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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2월17일(주일) 연중6주일 강론-김종선 신부님
  • 홈지기
  • 2019.02.18 04:15:05
  • 조회 수: 541

변한 건 없니~”

 

올해로 제가 입회한 지 10년 됩니다. 정확히는 10년 전 22일 봉헌축일에 입회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봉헌축일 날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한 형제에게 이 노래를 조그맣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는 금방 제가 왜 이 노래를 부르는지 눈치를 챘습니다.

너 변한 게 없다고 그러는구나

 

사실 그랬습니다. 나름 10년이란 세월 동안 수도원에 살았는데, 나이가 들고 겉만 수도자처럼

외적인 생활 양식만 바뀐거 같고 나의 내면은 여전히 정체한 거 같았습니다. 하느님으로

조금이나마 채워야할 마음의 자리, 아니면 하느님으로 채우고 싶다는 열정이 불타올라야할 마음의

자리에는 다른 인간적인 욕구들, 성공과 성취, 욕심, 높은 마음 등이 가득했습니다. 요 근래 어느

친구와 함께 나의 이런 마음들을 살펴보면서 좋으면서도 참 힘들었습니다. 나를 알아가고 하느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지만,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많은 물고기를 잡은 다음,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지난 주일 복음의 베드로처럼 깊은 나의 내면을

볼수록 저 좀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었고 급기야 엊그저께는 그냥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간 나의 모습과 생활에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이 이러한 나의 상황과 맥을 같이 하며서 반성을 해보고 희망을

가져봅니다. 1독서에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라고 나오듯이, “나는 이제까지 사람을, 그것도 가장 믿을만하지 못한 나 자신을

믿어왔구나. 그리고 나를 믿기 위해, 믿음직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엄청 애를 써왔구나.”라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비록 지금 나의 어두움 때문에 쓰러져 일어날 힘도 없고 눈물이 나지만

지금이라도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가난한 나를 보는게 하나의 축복이고 하느님께 가는 걸음이구나

라고 느끼게 됩니다물론 저의 이런 아픔이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겪었던 고통과 차원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아픔의 원인은 저에게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이런 아픔에서

마저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거 같습니다.

 

잠시 저희 수도회 성인이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성인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잃고 병원일을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21살 때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한 후, 좀 더 엄격하고 고요하여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수도생활을 열망하던 중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만나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인은 36살 되던 해에 전에 자기와 함께 살았던 수사들에 의해 수도원 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창문도 없고 벽돌 틈새로 아주 조금 빛만 들어왔고 화장실도 갈 수 없이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만든 통만 하나 있었습니다. 씻을 수도 없었고 밥도 아주 작은 양만 주어졌고, 금요일에는

식당에 가서 형제들 가운데에 무릎 꿇은 채로 모욕을 받고 욕을 먹으며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성인도 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이전에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욕망과 욕정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하고 철저한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합니다.

 

하지만 조그만 틈새 빛으로 성무일도를 하며 인내와 기도로 이 어려움들을 이겨낸 성인은 이곳에서

하느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영혼의 사랑을 노래하는 <영혼의 노래>라는 작품을 이

감옥에서 저술합니다. 이렇게 성인은 어두운 밤9개월간 체험하고 감옥을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후에도 예수님이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날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나에게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하라라고 했을 때에도 성인은 고통과 멸시만을 청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인은 고통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지를, 곧 고통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고통이 가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면서도 부활하셨기에, 비록 쉽지 않은 우리 삶이지만 그 안에서 희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가난할 때, 더 이상 내보일 것조차 없을 정도로 벌거벗겨 질 때 그 순간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의 싹이 심겨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나나 다른 사람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 기댈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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