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들을 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고향 사람들의 반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신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은 나자렛 사람들은 탄복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근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도전적인 자세로 나가십니다.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라든가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등의 격언을 인용하시면서 사람들을 자극하시는
듯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의도적인 자극이 아닙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을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의 그 탄복 뒤에 숨어있는 속마음을 아시고 그것을 드러내셨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경탄하면서도 곧바로 그분의 출신 배경을 따집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존재를 평가절하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이라도 많이 해보아라. 그러면 혹시 우리가 믿을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다면 어느 곳에서보다 바로
자기 고향에서 더 많이 행해서 자기들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서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일화를
들려줍니다. 이 두 예언자는 이스라엘인이 아니고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가 아닌 외국인들에게
선행을 베풉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 얽매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자기들의 고향과 고국 곧 자기의 경계선을 넓혀가고
자기의 한계를 극복해나가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만, 자기의 이익에만 안주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나오라고 요구하고
도전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족 이외의 타인에게는 배타적입니다. 백인들은 흑인을 무시하고 크리스찬들은
무슬림교 신자들을 적대시하고 혈연과 지연,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싸우고 헐뜯고 진실을 인정하기를 너무 어려워합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마음 쓰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버거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신앙은 자신의 안일과 위로와 이익을 찾는 것이나 죽어서 나 하나 천당가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이기에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은 우리를 마냥 마음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안락한 껍질 속에 안주하라고 눈감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걱정없이 우리의 이익만을 쫓으라고
격려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되고, 강자가 되고,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자가 되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산벼랑에서 밀어뜨리려 했던'
사람들, 결국 예수를 죽인 이들이 찾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따라오라 하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도전자이십니다. 젊은 케네디 대통령이 꿈꾸었던 뉴프론티어, 새로운 변방을 향하여
눈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껍질을 깨고 나오라고, 눈과 마음을 우리의 울타리 너머로 돌리라고,
당신의 길을 따르라고 도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과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나서라고,
일어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가라고 재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