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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 최현민 수녀님
  • 홈지기
  • 2018.01.26 04:44:05
  • 조회 수: 1120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수녀원 창가에서>에 실린 글

 

어느 날 조카 지수가 자기 아빠에게 물었단다. “아빠,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함께 외식하던 자리에게 동생은 조카가 한 이 질문을 내게 넌지시 건넨다.

나는 망설임없이 간결하게 웃으며 답했다. “행복해지려고^^ ”

 

성소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그 길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그 길을 택할 수 있을까?

 

1985년 내가 수도원에 들어올 때에는 열두명이 함께 입회했다. 당시 우리 수도원의 역사상

지원자 수가 가장 많았던 때다. 그렇게 수도성소가 붐을 이루던 전성기를 지나 이젠 1년에 한 두명,

아니 아예 지원자가 없을 때도 있다.

이렇듯 성소자의 부재현상은 현대사회에서 수도성소는 그만큼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얘기겠다.

흥미로운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이라는 수도서원의 가치는 얼마나 현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수도원에 남아 있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이 곳에서 살게 하는가?

수도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는가?

 

취약함의 신비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강해져야 하고 많이 가져야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대학가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진풍경들이 벌어진다. 바로 대학생들 중 4년만에 졸업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배우는 것에 심취해서 대학에 오래 몸담고 있으려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가기 전에 더 많은 자격증과 더 많은 스팩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남들보다 더 나은 상품가치로 만들어야 비로서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현대 젊은이들의 심리는 현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정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렇듯 더 강한 권력과 더 많은 소유를 지향하는

문화 속에서 수도생활이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수도자들이 지향하는 순명과 가난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강함과는 너무도 다르다. 사랑은 ‘취약함의 신비’를 안고 있다. 그 신비의

정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취약함의 신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취약함은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택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결코 녹녹치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이나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밖에서 기다리신다.

 

수도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공동체 생활이 아닌가 싶다.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 솥밥을 먹고 사니 그 안에서 온갖 부딪힘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관계 안에서 힘을 빼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의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힘을 뺀다는 건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힘을 뺀다는 건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리라.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이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어머니들은 늘 자식들에게 진다. 그건 바로 자식을 향한 사랑 때문이리라.

 

요한묵시록에 보면 하느님은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묵 3,20)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스스로 문을 열지 않고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신다. 왜 하느님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실까.

장애인들과 함께 일생을 산 장 바니에는 하느님이 얼마나 취약하신 분이신지에 대해 말한다.

하느님은 결코 힘있게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밖에 서서 노크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이다.

‘만일 누가 듣고 문을 열면 그 때 난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 밖에서

기다리시고 문을 노크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취약성을 발견한다.

 

사랑할 때 취약해지고

 

‘사랑은 취약하다.’ 취약하다vulnerable의 의미는 어원상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의 라틴어

vulner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상처를 입기 쉬운이나 공격이나 피해에 노출돼 있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취약함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불확실하고 그래서 위험이 따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내가 그를 사랑할지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건 취약함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취약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사랑할 때는 목이 뻣뻣해질 수가 없다. 사랑을 경험한

이는 이 말에 공감하리라. 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고 가능한 자신을 낮추고

부드러워지려 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육화의 신비 이상 더 명확히 보여주는 게 있을까?

 

나는 오늘도 이 수도성소를 택한다! 그리고 내가 속한 사랑의 씨튼수도회 창설자

엘리자벳 앤 씨튼께서 하신 말씀을 오늘의 양식으로 삼아 힘차게 또 하루를 시작해본다.

 

“내 일상생활의 목표는 모든 사건을 온유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모든 알력을 부드러움과

쾌활로 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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