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성 금요일은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함께 모여 주님의 수난이라는 사건을 생생히 상기하고, 깊은 애착을 가지고 그 사건에 참여하면서 , 주님을 기리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모여 하려는 이 전례는 내 인생의 십자가를 다시금 사랑하려는 시간입니다. 말 그대로 십자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끌어안는 다짐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자 하셨던 그분의 사랑을 만납시다.
사순의 절정인 이 시간, 십자가의 감동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하여 그분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그분의 삶의 결론이요, 완성인 것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의도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 살맛나는 세상, 행복이 가득한 세상,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타인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예수님의 투신을 표현 한 것이기에 십자기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피땀을 쏟아 내시면서도 저 십자기를 선택하신 것도 오직 사랑이요, 숱한 매질과 침 뱉음, 능욕과 모욕을 감당하게 만든 것도 오직 사랑이요, 세 개의 못이 손발을 뚫고 나와 온 몸에서 죽기까지 모든 피를 죄다 쏟아 붓게 만든 것도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 어느 정도의 사랑입니까? 벗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바치는 정도의 사랑이요, 원수를 위하여 나의 목숨을 바치는 정도의 사랑이고, 지금 나를 죽이는 저들을 위하여,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주는 그 정도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십자가에 짐승처럼 매달린 한 사람의 이 한 마디로 인하여 수천 년 이어져 오던 그 악의 고리가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의 죽음으로 대신 갚아낸 그 사랑이 사람들을 짓밟던 엄청난 무게의 복수의 돌덩이를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보복과 악의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버렸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사랑입니다.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을 골라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야 할 사랑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악을 쳐 이기기 위해 벌이는 사투 같은 사랑의 정점, 바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대신하여 고통 받고, 급기야 원수를 위해 죽기까지 ‘망설임이 없는 사랑’ 그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탄은 십자가의 길만을 막으려 하셨지만, 그분은 십자가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저주의 그 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격려와 위로를 나누십니다. 분노와 절망의 길에서 예수님은 용서와 자비를 나누십니다. 악의 세력에 무죄한 이가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도 예수님은 연민과 긍정을 잉태하십니다.
사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부정의 힘 ,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힘 , 폭력의 힘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협잡을 꾸미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직 나의 이기와 나의 편리를 위해 타협과 담합을 일삼는 힘입니다.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저 내 한 몸뚱아리 호의호식하는 일에 모든 것을 내맡긴 힘, 주로 이런 힘 위에 놓인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는 오로지 강한 것, 많은 것, 큰 것, 힘과 능력입니다. 이렇게 부정의 힘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나의 부정함과 약점을 감추기 위해 곧잘 남의 허물을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몰아세우고 남을 죽입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힘 하나가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 남을 위한 십자가의 힘, 비폭력의 힘입니다. 아무런 죄 없는 존재가 남을 위해서 단죄를 받고 고통을 받고 급기야 죽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가 남긴 사랑의 힘이 드디어 악을 쳐 이기기 시작합니다.
연민과 사랑은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길입니다. 분노와 배반 미움 보복이 전부인줄 알았던 세상에 섬김과 나눔, 봉사와 희생이 기능하게 만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소유의 방식이 아니라 비움의 방식으로, 높아짐의 방식이 아니라 낮아짐의 방식으로, 강함의 방식이 아니라 약함의 방식으로 이김의 방식이 아니라 짐의 방식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무죄한 이로써 몸소 가장 비참한 죽음을 안으시면서 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죽음, 세상의 악을 쳐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말해야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기쁨이요,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은퇴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참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여러 진리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믿는 하느님은 저 하늘 넘어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되신 하느님이며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고통을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교 계시의 중심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심판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 까지도 끌어안으시는 희망과 구원의 하느님으로 명백히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앤도우 슈사쿠의 ‘사일런스’(침묵) 영화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보시는 듯, 침묵하시는 하느님, 그러나 우리의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성금요일 전례는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관조하면서 ,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요 종착지인 사랑의 신비를 침묵 중에 관조하고 흠숭하며,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에 의해서만 세상의 구원이 달렸음을 고백하며 , 우리도 기꺼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십자가의 경배 예식에 참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