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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20160208 설날 - 이영수 신부님 강론
  • 홈지기
  • 2016.02.09 00:02:15
  • 조회 수: 1791

설날

 

오늘은 설날, 음력 새해의 첫날입니다.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주신 하느님 덕분에 인간들은 대단히 오래전부터 날짜의 기준을 정해놓고 한해를 돌아보며, 하느님과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새해에도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 풍요한 결실을 맺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단지 우연한 연속이 아닙니다. 물론 단순한 시간의 흐름으로서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그리스어에서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인데,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고,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했습니다. 계획된 목표를 위해 무르익은 순간을 뜻하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생명으로 채워진 현재이고 선물로서 주어진 시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여전히 고달파 보이고 힘겨운 순간이 닥쳐와도 ”우리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난 시간 속에서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닥치든 ”하느님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실패의 아픔 속에 슬퍼하는 중에도 우리는 결국 우리 삶이 하느님의 더 큰 생명과 희망의 축과 합류하리라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새로운 시간’이란 달력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다짐과 결심 속에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새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끝없는 시작의 새로움은 시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심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결심 속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간을 지내는 이유입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만들고, 앞으로 벌어질 일상의 삶은 결코 소홀함이 없이 소중하게 보내리라는 결단, 이것이 오늘 이 설날을 축일로 보내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은 이 세시를 정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출발하는 자리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럼, 다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복음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고 가르치십니다. 허리에 띠를 띤 사람은 일하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종은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런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어라.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정말로 이 한 해가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는 나날이 된다면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길이 고생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1년에 한번인 구정 명절을 고향에서 지내고 싶어 하고, 부모와 친지들을 만나고 성묘를 하며 자신의 삶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고향을 찾는 명절의 모습을 닮기를 요구합니다. 영원한 고향인 천국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도록 영원을 향해서 걷기를 당부하십니다.

 

사실, 걷기라는 단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신 단어라고 합니다. 가톨릭의 소설가로 알려진 베르나로스가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라는 말처럼 교황님은 “모든 것이 걷기입니다.”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한 걸음 한걸음이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모든 이를 위하여, 고통당하고 억압당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과 함께 나에게 남겨진 시간을 쓰는 일입니다. 이것이 설날에 우리가 함께 다짐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이 귀한 시간, 금년 설날 아침에 구상 시인, 세례명이 요한인 당신을 향해서 읊조리는 시 한 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설날 아침의 햇발 같은 눈부신 시를 써서 온 세상에 빛난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느냐.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 네가 미스 월드를 아내로 삼고 보료를 깐 안방과 만권의 서가가 구비된 사랑에 살며 세 때 산해진미로 구복을 채운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느냐.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남보다 뛰어난 건강을 가졌거나 천만인을 누르는 권세를 쥐었거나 화성을 날아다니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우지치 못하느냐.
너, 영혼의 문둥이 요한아! 만일 네가 네 안에 참된 기쁨을 누리자면 너의 오늘날 삶의 모든 것이 신비의 샘임을 깨달아 그 과분함을 감사히 여길 때 이루어지리니 그래서 일찍 너의 형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천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거두어 도둑들에게 주셨더라면 하느님은 진정 감사를 받으실 것을’하고 갈파하셨더니라.“

 

정말, 새해 아침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신비의 샘 이신 하느님을 우러러,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언제나 온전한 기쁨으로 바뀌는 나날이 되도록 축원합니다.

 

김수환추기경님은 왜 자신을 바보라고 했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좀 더 깨닫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볼 수 있는 그 힘, 좀 더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볼 수 있는 아둔한 자신을 바라보는 힘이 바보의 위력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금년 한 해도 우리 모두 바보가 되어 살아보기로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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