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씨튼 수녀회

20151102 위령의 날 - 이영수 신부님 강론
  • 홈지기
  • 2015.11.05 05:22:25
  • 조회 수: 1722

위령의 날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며 죽음과 영생을 묵상하는 11월 위령성월 첫날에 교회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모두가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교회공동체의 염원이 담겨있는 의미 깊은 일입니다. 그럼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성인의 통공을 드러내는 한 모습이며,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신앙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행운인가를 다시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믿고 세상을 믿고 사는 길입니다.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식이지요. 그러나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불안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고 산다는 사람들일 수록 대단히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충분한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능력도 필요합니다.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만가지 이름의 보험도, 연금도, 넉넉할 만큼의 은행 잔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령 힘겹게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본질적인 불안이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사는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고 이 세상을 산다는 일이, 세상 그 어떤 보험으로도 그 어떤 연금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든든함을 지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세상, 나의 젊음, 나의 능력 , 나의 소유, 나의 시간... 이 모두는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사라짐이 그다지 두려운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죽음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지만, 하느님을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열리는 첫 시작이 됩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손님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실은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나와 함께 자라고 있는 내 안의 한그루 나무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나무가 자라 내 키보다 더 커져 버리면 나는 이제 그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쉴 따름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걸작품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어찌 내 삶이 소중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꼭지점입니다.

 

지극히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요, 에너지이며 , 삶의 입니다. 죽음을 열고 들어가면 삶이 보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답이 보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인생에 큰 행운이며, 행복임을 다시 깨닫는 은총임을 감사드리는 날이 되십시다.

이 게시물을

번호
제목
파일
작성자
날짜
조회 수
2015.11.05
1722
150
2015.11.02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