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대축일
오늘은 사랑 때문에 한 없이 낮아지신 하느님의 오묘한 강생의 신비 앞에 놀라움과 감사함으로 천사들과 목동들과 함께 경배드리는 기쁘고도 거룩한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가잔 비천한 곳에, 가장 낮추어진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에 대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그 강생의 신비를 음미해봅니다.
장바니에는 “영원에 이르는 지식”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TV 25편의 시리즈를 기초로 ‘요한복음서 묵상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들어가는 말의 마지막 구절이 여운으로 오래 남습니다.
”내가 이 책에서 나누고 싶은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과 흐름 뒤에 내가 들었던 음악이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고통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아울러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나약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 가슴을 따뜻하고 뭉클하게 했던 내 지성을 열개했던 내 인생에 희망과 의미와 방향을 제공했던 ’노래‘ 에 귀를 귀 울렸다. 나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설령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을지라도 슬픔과 절망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 줄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우리가 함께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노래하도록“
장바니에가 그토록 부르고 우리 모두가 함께 다시 부르고 싶은 이 간절한 희망의 노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로고스‘(말씀), 빛 그리고 ’생명‘으로 이어지는 요한복음서의 서문에 메아리쳐오는 구절들과 함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 (요한 1장 14절)는 인간을 향한 제한 없는 무한한 사랑이 아닐까요?
장바니에는 요한복음서의 서언(요한 1장 1-18)은 범상치 않은 인간 본성의 치유에 대한 신비스러운 시로 시작이며 이 시는 복음서 전체를 요약하는 절로서 구원의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시고 내려오셨다는 놀라운 강생의 사건은 분명 요한복음의 핵심이고 시작과 끝입니다.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사람이 되어 자신을 내어주시어 당신의 창조사업을 완성하십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마지막 정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악의 세력은 고통을 가져오고 혼란과 혼돈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어두움과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해야 이 혼란스럽고 어두운 세상에 구원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우리에게 단순한 말이나, 선언이나, 강령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바로 예수님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아버지의 품속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당신과 아버지와 나누는 바로 그 사랑의 관계 속으로 우리 모두를 데려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서로 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가난하고 비천하고 부서진 인간들에게 복된 소식을 특별한 방식으로 전하시기 위하여 가장 무력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모든 이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아래로 내려가 가난하고 눈멀고 귀먹은 이들을 섬기며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여주고 그들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사랑받은 자녀임을 일깨워 주라고 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아기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강생의 신비이고 구유의 신비이고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라쉬 공동체를 창설한 장바니에는 ’이 가난하고 볼품없는 그들이 사람의 몸을 지닌 의미와 그 연약함을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몸소 사람의 몸이 되어 상처 입기 쉬운 몸으로 내려오신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다고 증언하면서 여기에 우리 구원의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는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 2장 6-7)
오늘 우리는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았던 천박한 식민지의 땅 갈릴레아 그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고을 베들레헴 사람이 쉬지도 못할 마구간 짐승의 밥그릇에 놓인 아주 작은 아기의 탄생을 조용히 떠올려 봅니다. 우리와 이 땅의 어둠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세상은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높이 쌓아야 하고 더 커져야 잘 산다는 세상, 그래서 그 잘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유는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유한 자를 내치시고 바로 우리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시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구유는 말하자면 또 다른 도구인 십자가입니다. 구유 앞에서 우리가 오늘 선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식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에 대하여 나 스스로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유 앞에서 하느님의 방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나에게 물었다“는 주제로 2016년에 교황청에서 했던 피정 강론에서 론키 신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행동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천사의 입을 빌려 ‘무서워하지 마라’는 말로 시작된 찬양 노래를 듣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니에게 평화“
아기 예수가 바라는 평화는 절대로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힘이 아니라 연약함의 대명사인 강생, 사랑, 죽음이라는 약하고도 힘든 제한 없는 사랑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안으로부터의 완전한 정복을 꽤 하십니다. 오히려 어둠의 악이 살아있는 동안 내버려 두십니다. 그분은 느리고 힘든 방식으로 본질적인 것들 , 즉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선하게 하는 약한 힘으로 악을 아예 쫓아내는 이 제한 없는 사랑의 길을 택하십니다. 강력한 힘과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 온유와 겸양과 순종을 통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마지막으로 디트리히 본회퍼가 교수형에 당하기 얼마 전 아우치부스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의 약혼자였던 마리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안에 있는 ‘성탄의 시” 마지막 부분만 들려드립니다.
선한 능력의 힘에 감싸여...
어둠 속에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 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임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 나라 확장되어 갈 때 모든 주님의 자녀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그 우렁찬 소리 듣게 하소서.
주님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놀라운 평화여!
낮이나 밤이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은 다가올 모든 날에도 변함없으시니 무슨 일 닥쳐올지라도 확신 있게 맞으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