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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3월4일, 사순 3주일(나해) - 이영수 신부
  • 홈지기
  • 2018.03.04 23:58:58
  • 조회 수: 1732

 

오늘 복음에는 폭력성이 농후한 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평소 사랑과 용서 정의와 나눔을

말씀하셨던 그분의 입에서 고성이 나오고, 손에는 채찍이 들려있습니다. 장소는 거룩함의 결정체요 단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단 하나의 성전 앞뜰입니다.

 

성정은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교는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전에 봉사하는 제관들의 권위도

높아졌습니다.

사람의 권위가 높아지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행세하는 곳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제관들이 하느님 행세를 하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숱한 계율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바쳐야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성전 앞뜰에서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사야만 합니다. 집에서 가져온 짐승들도

제관들은 흠이 있다하여 성전 앞 장사꾼들에게서 새로 사게 만듭니다.

성전 세금도 옛 화폐로만 받았습니다. 그러니 환정상도 필요했습니다.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장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관들과 장사꾼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뒷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복합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이러한 성전에 대한 정화 이야기가 공생활의 말미, 즉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예루살렘의 입성 다음 일로 보도하고 있으나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공생활의 첫부분에 자리하게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공생활 초기에 정화하셨다는

소리는 바로 예수님의 목적과 활동이 바로 성전의 정화, 곧 유대교를 정화하는 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의 정화는 예수님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당신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겼던

일입니다.

 

유대교는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계약의 궤와 속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신봉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런 유대교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세력화되고 제관들을 중심으로 권력화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사람을 소외시키는 건물로만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교를

씻으시는 분, 이러한 유대교에 의해 피로 속죄하시는 분이 되셨음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엄격하고도 단호하십니다. 결국 채찍을 드시고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시며 호령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아마도 이것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구조적 범죄의 우두머리들에게는 적지 않은 위협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 길을 재촉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겠지요.

하지만 그분은 죽을 줄 알면서도 기어이 일을 저지르십니다. 예수님으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오로지 사랑때문에, 사랑이 모든 이유가 되어,

그리고 사랑 하나를 위하여 생명을 빚으시고 생명을 섬기고 생명을 베푸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사랑에 관한 끝없는 사라요, 용서와 자비와 나눔과 섬김이

이 땅에 샘처럼 솟아날 것을 꿈꾸시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눔과 섬김으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더 없이 훌륭하게 완성되어 가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힘없고 가엾은 이들이 아무 대책 없이 당해야 하는 소외와 억압,

죄인들을 끝까지 죄인으로 내몰고, 가난한 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구조적인 악과 악의 법질서로부터 오로지 자유와 해방을 바라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은 바로 그런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하느님의 집, 성전을 세우기 위해 성전정화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어서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고 전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신앙들은 성찬의 빵을 예수님의 몸이라 불렀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시지 않고, 예수님의 몸인 성체성사 안에 살아계신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유대교 신앙을 쇄신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력은 십자가의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에 시작된 성체성사와 그것을 먹고 마셔서 예수님의 생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 쇄신은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많은 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이 실천 안에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라면 내 몸을 통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끈이라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끈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몸을 성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이 몸을 교회답게 보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정화된 우리가 바로 새로운 성전이고 예수님의 몸을 먹고 나누는 우리 자신이

바로 새로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채찍은 이제 나를 행햐 내리쳐야 합니다.

그저 이 한 육신의 부위와 이 몸뚱아리의 보존에 쩔쩔매고 있는 나를 위해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교회이고 내가 바로 성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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