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루가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목적과 제자들이 취해야할 몸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
글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어떠한 것에도 의존함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가능한 일입니다. 대표적으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 길을 따랐었지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파견 명령에 담긴 속뜻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완전한 무소유를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 선포의 중요성과 우선성이 담긴 말씀이지요.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 자는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만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음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 33)
오늘 복음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추어 보니까 저는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나에게 유리한
해석을 통해 요리조리 빠져나갔습니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 무엇을 챙겨 가지고 나갈까?
오늘은 어떤 메뉴로 먹을까? 내가 머무는 그곳은 얼마나 편안한 장소일까? 교회의 일을 잘 수행하고,
좋은 결과를 얻고,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사제! 그러기 위해서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물질, 장소, 지식, 사람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을 드러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했고, 순전히 인간적인 방식, 인간적인 수단이 없으면 불안해했습니다 . 조건이 합당치
않으면 불만을 털어놓았고 투덜거렸습니다. 이것저것을 구해서 쌓아 놓았고, 신부라는 이름만으로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저는 무언가를 꼭 쥐고 있고 , 빵빵해진 보따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에게는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 여벌옷 등이 얽매이지 말아야 할
품목들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다른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프란치스고 교종께서
말씀하신 영적 세속성’에 물드는 것이지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 93-97 항에서 영적 세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세송성을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세속성은 서로 긴밀히 관련된 두 방식을 통하여 더 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의 매력입니다. 이는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고 말게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신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나
규율의 안정성은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익적인 엘리트주의를 낳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 버립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다운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주의적 내재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순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다운
복음화의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객이 바뀌었다. 본말이 전도 되었다’ 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복음선포의 사명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복음은 중심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사제가 있고, 수녀가 있고, 교구가 있고,
수도회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계속해서 이렇게 비판하셨습니다.
"이 음험한 세속성은 대립되어 보이지만 하나같이 교회의 공간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지닌 수많은
태도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례 , 교리, 교회의 특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리고 현대의 구체적인 요구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 생활은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영적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또는 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뒤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또한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 다시말해 여행, 회합, 회식, 연회 등으로 가득한 바쁜
사회생활로 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또한 통계와 기획와 평가에 매달리는 관리자의
기능주의로 표현되며 그 주요 수헤자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강생하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호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이 되어, 멀리 있는 이들이나 그리스도를 목말라하는 수많은 사람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복음적 열정은 더 이상 없고 자아도취와 자기만족의 공허한 쾌락만이 남게
됩니다.”
교종은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영적 세속성의 문제를 비판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지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존경하는 수녀님들,
우리의 영적 사부이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세 기념일에 드리는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명을 지속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투신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예수님만이 나의 ‘지팡이', 나의 ‘여행 보따리', ‘나의 빵', ‘나의 돈, 나의 옷’이 되도록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