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목요일 미사
이제 성주간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고통만이 넘쳐나는 피의 축제가 아니라, 당신 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삶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음을 기뻐하는 생명의 축제입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어야만 하는 그런 시간, 그런 성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과 생명이 교환되고 저주와 축복이, 어둠과 빛이, 땅과 하늘이 교환되는 파스카의 신비를 재현하는 거룩한 성삼일의 첫날, 주님 만찬 저녁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밤, 우리는 성체성사의 신비 속으로 초대받을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헌신과 하느님의 놀라운 자기 비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밤, 우리는 사제가 누구이고, 수도자의 참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극복하며 분리를 이겨내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우리 안에 드러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필생의 꿈이 무엇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삼일 중의 첫날인 오늘 성목요일은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입니다.
그 첫째는 바로 성체성시를 제정한 날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두 번째는 사제직이라는 직무가 제정된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고, 또한 이것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기념되기 위하여 당신 제자들에게 이 성체성사를 보존할 직무를 명령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형제애를 실현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난 다음 이렇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십니다.
어느 정도의 사랑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정도의 사랑, 그리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수 있었던 그 정도의 사랑, 죽기까지 사랑해야 하는 그 정도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정도의 사랑을 오늘 예식 중에 거행될 세족례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발 씻김의 예식은 오늘 성목요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 세 가지, 성체성사 제정과 사제직의 설정 그리고 형제애의 정도를 한꺼번에, 고스란히, 보여주십니다. 성체성사의 정신이 무엇인지, 사제 직무와 수도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형제애의 기준은 무엇인지, 세족례는 보여줍니다.
참 사랑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의 발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의 발을 씻기듯이 내 모두를 내어던지는 것이고, 그의 발에 입 맞추듯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의 끝자락마저도 내려놓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그의 사랑을 온전히 녹여낸 이 성체성사가 장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본질을, 그의 명을 따르는 사제의 본질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려는 우리 수도자들의 본 모습을 발을 씻겨주시던 이 밤에 담아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발을 씻겨주는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의 발을 품고 그의 발에 입 맞추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만 있다면, 바로 그분이 꿈꾸시던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그곳이 천국이요, 바로 그곳이 부활임을,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4복음서 중에 가장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어 성체와 성혈로 내어주시는 장면을 삭제하고, 대신에 그 자리에 바로 오늘 이 예식, 당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을 삽입합니다. 이것으로 성체성사의 의미, 예수의 몸을 먹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드러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먹고 치우는 절차나 요식행위가 아니라 바로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그 실천임을, 서로 발을 씻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종처럼 무릎을 꿇어 상대방의 가장 낮고 가장 추한 상처에 입맞춤함으로써 결국 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랑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그래야만 삶과 사랑이 일치하고,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으며, 이것이 연속될 때 비로소 삶과 죽음은 분리가 아니라 일치, 곧 죽음을 통해 삶,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리라는 성체성사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성체성사는 교회 정신의 핵심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그 핵심을 발 씻김을 통해 그 내용을 명확하게 채우십니다. 성체를 영하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의 발을 씻겨줄 그 마음으로 영하십시오. 그래야만 성체를 제대로 받아 모시는 일이 되고, 그래야만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그래야만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발을 씻겨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의 가장 부끄러운 상처와 심각한 고통을 보듬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냉대하거나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 정해놓고 자존심의 높낮이를 따지고 있다면 그것은 형제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성체께 대한 모독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죽는 일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이 마음으로 다시금 성체 앞에 설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