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몇 년 전 TV 광고에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강수진씨 누구신지 아세요? 아마 TV 등을 통해서 얼굴을 보신 분도 계시겠고 이름을 들어본 분도 계시겠지요.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이고 그녀가 보여주는 발레 역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하는 예술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TV에 나온 강수진씨의 발은 세상에 어떤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의 발보다 더 거칠었고 흉하게 뒤틀려 있었습니다. 보통 발레는 굉장히 어린 나이에 시작하기 때문에 아직 뼈가 굳지 않은 아이들이 발끝으로 서고 걷고 돌고 뛰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발가락이 뒤틀리고 굳은살이 배이게 되는 것이지요.
옛날 중국에서는 발이 예쁜 여인을 미인으로 생각했다지요. 요즘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어느 누구도 그런 발을 갖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발레의 아름다운 동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그 흉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도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TV를 통해서 그 발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웃으면서 우아하게 연기하던 발레리나의 발이 그 정도로 흉할 줄은 몰랐던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못생겼다고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흉한 발을 통해서 그녀가 보여주는 발레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그 흉함은 강수진씨 아름다움의 일부이며. 아름다움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 시키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죠. 상처는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고 감추고 싶은 흔적인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꺼이 보여주시고, 제자들은 그 상처를 보며 기뻐합니다. 예수님 수난의 극치이고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이고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을 흩어지게 한 절망이었던 그 상처가, 이 순간 모두 기쁨으로 바꿉니다.
과연 이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첫번째 기쁨은 제자들이 바로 그 상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이 상처받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각자가 '나' 다워지는 체험 - 나의 모습이 완성되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픔과 절망의 체함이 없는 성녀 씨튼이나 성 프란치스코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약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약함 속에서 당신의 강함을 계시하십니다. 십자가의 상처는 예수 부활의 반대말이 아니라 예수 부활의 일부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상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예수님다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두 번째 기쁨은 죽음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기쁨인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기쁨과 믿음의 원천이 됩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은 -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죄가 결코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삶의 십자가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도우심 또한 결코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기쁨이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시고 그 끊어지지 않는 유대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카리스마는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기는 소소한 분열들을 잊고 살던가, 혹은 쌍방 간 반성과 사과가 전제된 화해를 용서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리스도의 용서는 그와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내가 받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상대방에게 책임지우지 않고 내가 끌어안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신의 영역이고 인간은 그저 망각할 수 있을 뿐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그리스도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치의 모범을 우리는 수도회 창설자들의 근본 영성 안에서 발견하고 먼저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고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상처와 용서는 그렇게 대단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주어지는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삶이 늘 그런 기쁨으로 충만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