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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20150531 삼위일체대축일 - 문창우신부님 강론
  • 홈지기
  • 2015.05.31 21:32:06
  • 조회 수: 3352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요즘 10, 20대들 청소년(젊은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불과 한 두 세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세대간에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예컨대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애,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덕후 -뭔가 과도하게 빠져있는 사람, 병맛 -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좀 이상하고 특이한 애라는 말입니다.

 

열폭 - 열등감 폭발, 광클 - 미친 듯이 클릭하는 것, 뻐정 - 버스정류장, 뻐가충 - 버스카드충전 , 듣보잡 - 듣도 보도 못한 잡것·사람, 괜춘 - 괜찮아?, 에바 - 오바란 뜻 · 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거나 또 누군가한테 핀잔을 줄 때 , 짝남 - 짝사랑하는 남자, 썸남 - 썸타는 남자(사귀기 전에 주고 받고 막 데이트 하는 관계), 여소 -여자소개 , 남소 - 남자소개 , 읽생 - 읽고 생깐다, 기둘 - 기다려 , 셀기꾼(셀카 사기꾼) - 사람들이 막 사진을 찍고 포토샵을 많이 해서 너무 예쁘게 나오거나 아니면 조명을 잘 받아서 예쁘게 나오거나 여튼 셀카가 사기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불과 한 두 세대만 차이가 나더라도, 의사소통 이 아주 힘겨운데 , 무려 2천년에 가까운 세월 전에 쓰였던 언어들은 어떠할까요? 2천년이 다 되어가니 말이나 단어들을 그 때와 똑같이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단어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축일인 삼위일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약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비밀리에 알려주신 신비스런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는 없습니다. 3세기부터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 문법과 이론을 먼저 배우지 않고 체험과 반복을 통해서 배우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이론과 신학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화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명기인데 모세의 설교집의 내용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에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만을 믿고 따르며 그분이 일러주신 말씀을 지켜야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체험 안에서 갖게 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삼위일체는 성모님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품기 위하여 성부께서 성모님과 함께 하시고 성령의 힘으로 성자를 잉태하신 모습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함께 활동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함께 하십니다. 성부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시고 성자께서는 우리의 길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한편 , 2독서(로마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동참하게 된 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자기 안에 살아 일하시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돌봐주며, 용서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인간의 관행을 넘어, 신앙인은 이웃을 돌봐 주고 용서하며, 이웃과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세계에 열린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하는 내용의 범위는 우리자신의 관심의 범위입니다. 우리 기도가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직계가족과 공동체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관심을 우리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저의 경험 안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구약시대라고 해서 성자나 성령의 작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시대에 그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그 모습은 달랐지만 역사 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느님은 성부 하느님도, 성자 하느님도, 성령 하느님도 아닌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더 확대시켜 보려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하느님의 모습은 힘세고 강한 성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자비이신 성자 하느님 ,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불태우고 힘과 용기를 주시는 성령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보며 하느님이 왜 이리 무자비하신가 하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하느님을 믿으려면 우리는 삼위일체로 온전히 드러난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 얼굴을 볼 때에 물론 앞만 쳐다보아도 되지만 옆면과 뒷면까지 모두 보아야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만 보고서 신앙을 결정하면 자기 잘난 맛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자 하느님, 즉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앙을 가지면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이단들처럼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말씀만 가지고서 장난질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느님만 바라본다면 기적과 은사에만 목매는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신앙 감각을 키워야만 우리 삶 안에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든든한 보호자로써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요즘 우리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우리정부 지도자들은 경제만을 외치면서 경제규모 10위권 육박, 국민소득 3 만불 시대 도달 예측이라고 장밋빛 전망을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국민들이 느끼는 현실은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불행하게 느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개인 아니면 가족단위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자주 줄을 잇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은퇴 이후에 자식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정부의 연금이나 보조금으로도 살아가기가 막막해서 목숨을 포기합니다.

 

청년들은 학교 졸업 후에 사회생활의 첫출발을 첫 번에 대기업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평생 을의 신분에서 갑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청년들이 모두 을의 신분에 남아있지 않기 위해서 첫 출발부터 갑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청년실업자가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혼 적령기 청년들이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도 포기 합니다.

 

대기업 회장이 검찰에서 조사 받다가 목숨을 잃는 최후의 선택을 하면서 이 나라 최고층의 고위관료사람들 여러 명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넸음을 고발하였습니다. 사정당국이 조사에 나서기는 했지만 불구속 기소와 협의 입증곤란 등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리라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년 416일 이후 상당수 국민이 세월호 참사로 인해 트라우마에 빠졌습니다. 1년이 넘도록 아직도 유가족들이 자식들이 왜 바다 밑에 가라앉아야 했는지 누구도 속 시원히 밝혀주는 이 없고 누구도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어서 제정신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진상이 밝혀 질수 있을 것인지 향후 전망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슬픔과 좌절 , 울분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광화문 광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유가족들에게 한 치도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참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나 혼자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라는 존재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시지만 셋이십니다.

 

즉 스스로 공동체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역시 이 세상 안에서 혼자서는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늘 셋이 하나이셨듯이 우리도 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개인주의, 나아가 이기주의로 대표되는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삶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느끼고 일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온전히 얻지 못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 삼위일체란 나와 이웃, 그리고 하느님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모습은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 같은 검은 먹구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의 바람으로 그 먹구름을 멀리 흩날려버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관심의 나래를 아주 넓게 넓게 세상 끝까지 펼치면서 주님께 도우심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상에서 을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갑에게 억압당하고 차별당하는 비천한 이들, 힘없는 이들, 눈물짓는 이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빨리 도우러 와 주시길 끊임없이 간청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지금 이순간도 인간 이하의 치욕을 겪으며 사는 북한동포들, 네팔지진피해자들, 시리아 등 아랍 난민들, 남 수단·부룬디·나이지리아 난민들, 전 세계 사막에서 바다에서 살아가는 이들, 최근 외신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타이 남쪽 말라카해역 인근에 미얀마로부터 탈출한 로힝야족 수천 명, 또 방글라데시에서 출발한 난민들도 있는데 먹을 것과 물도 없이 표류중입니다.

 

주님 안에 형제 자매여러분!

이제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를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삶을 본받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나로서의 삶이 아닌 우리로서의 삶을 실천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로 열려져 있는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찾아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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