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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운문] 이웃종교인에게 불교는? - 최현민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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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1 20:03:15
  • 조회 수: 3187

불교 운문사의 운문승가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 '운문'(가을호)에

씨튼연구소 최현민 수녀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웃종교와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과 생각을 담은 수녀님의 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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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門 잡지 (통권 제 130) 2014 가을호 (32-35)수록된 글.

 


이웃종교인에게 불교는?

                                                           최 현 민(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원장)

 


1. 오랜 수행전통을 지닌 종교로서의 불교

 

올 여름에 운문사 편집부로부터 <다른 종교에서 바라보는 불교>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내 종교, 남의 종교로 편가르는 듯한 인상을 풍겨서인지 다른 종교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다른 종교>보다 <이웃종교>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우리나라에서 이웃종교인들과 종교대화를 해온 몇 안되는 곳 중에 씨튼연구원이 있다. 필자는 이 곳에서 20여년간 종교간 대화를 해오면서 종교 간의 다름보다는 서로 간에 만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을 느끼곤 했다. 가톨릭수도자인 나는 불교에 매력을 느껴 불교를 공부해오고 있다. 내게 불교가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수도전통을 지닌 그리스도교처럼 불교도 오랜 수행전통을 지녀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내 삶을 되돌아 보면 불교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출가를 생각하실 정도로 불교신심이 깊은 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할머니 기일이 되면 가족과 데리고 강릉 포교당에 가서 할머니를 위한 제사를 지내곤 하셨다. 아마 내가 불교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도 할머니의 종교적 심성이 내게 전해졌음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그 후로 불교와 특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가톨릭 수도자가 된 후 여러 종교를 공부하면서 불교를 좀더 깊이 알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그건 아마 불교수행전통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게 강한 울림으로 전해져온 듯 싶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나고야에 있는 愛知尼僧堂에서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일종의 용맹정진인 셋신(せっしん 接心)’에도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체험은 지금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까지, 식사와 좌선 사이의 중간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했던 명상수행은 처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앉아있음그 자체에 익숙해져 갔고 몸의 앉음은 서서히 마음의 앉음으로 이어져갔다. 그렇게 1주일간의 셋신수행을 마칠 수 있었던 건 아마 함께 수행한 비구니 스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것이 바로 衆力修行 大衆威神力 아니겠는가? 셋신수행의 경험은 나의 종교적 울타리를 넘어 나를 더 깊은 진리 속으로 침잠케 만들었다. 바로 이러한 수행력을 키워갈 수 있는 종교전통이야말로 불교가 지닌 종교적 힘이며 그 힘이야말로 오늘날까지 불교를 존속케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갈수록 현대사회는 각박해지고 개인주의화되어간다. 서로에 대해 공감하기보다는 상대를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지쳐만 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망 속에 있음을 자각치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가 연기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을 깊이 드려다 볼 수 있는 명상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하다. 나는 오랜 수행전통을 지닌 불교적 가르침이 현대인에게 더욱 절실한 이유를 여기서 발견한다.


 

2. 종교대화의 장에서 만난 불교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독특한 다종교문화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땅에 종교적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종교 간의 분쟁과 갈등을 겪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평화적 공존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씨튼연구원에서는 유교 불교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다섯 종단에 속한 교수님들이 함께 모여 같은 책을 읽고 발제와 토론을 하면서 서로 간에 배움을 넓혀가고 있다. 94년 첫 모임을 가진 이래 매년 네 차례 걸쳐 세미나를 해오고 있는데 그 중 세 번은 씨튼연구원에서, 한 번은 12일로 사찰이나 가톨릭 수도원 혹은 피정의 집, 유교의 향교, 원불교 수련원 등 각 종교의 수행처나 시설에서 모임을 해왔다. 그 때 각 종교 의례나 의식에도 참여함으로써 이웃종교를 체험하는 기회도 갖고 있다. 20년간 이 모임에 함께 해온 나는 이웃종교 안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대화모임을 은퇴하셨지만 초창기 씨튼연구원 창립회원이셨던 전 중앙승가대학총장 종범 스님은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이면 선사답게 일침을 가해 저희의 대화를 통합해주시곤 하셨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10여년간 함께 해주신 해주스님의 해박한 화엄학적 해석 또한 이 모임의 대화를 심화시켜주곤 했다. 해주스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 그 전에는 불교 이외에 다른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모임을 통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종교를 이해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그간 씨튼연구원에서 해온 종교간 대화는 녹취∙정리하여 운주사출판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동안 이루어진 종교대화에 관심있는 분들은 이 책을 일독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본다.


지난 8월 한국을 다녀가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하고 개종을 강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그 신념에 충실히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종교인일수록 자기신념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한 것 같다. 이렇듯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시대정신에 맞추어 재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석존께서는 가르치신 찰라생 찰라멸이라는 무상의 진리를 깊이 자각한다면 세상 변화에 유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만큼 무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계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만일 한국불교가 현대사회의 실상을 직시하면서 그에 걸맞는 무상 연기적 해석과 실천이 수반되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출세간적 종교에 머물 위험이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진단해본다.


 

3. 오늘을 사는 불자들에게 거는 기대

 

작년에 20돌을 맞은 씨튼연구원은 조계사 한국불교 역사문화 기념관에서 <하나뿐인 지구, 생태문제와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로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다. 문화 체육관광부는 물론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도 여러모로 후원해 주셨고 총무원장이신 자승스님께서 직접 축사까지 해주셨다.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행사를 마친 후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심포지엄에 대한 스님들의 참여도가 의외로 저조했다는 사실이다. 장소도 조계사이고 주제도 현대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 생태문제를 다루었기에 많은 분이 오시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제하신 스님들과 몇몇 분을 제외하곤 스님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불교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홍보도 나름대로 했는데 스님들을 비롯한 불자들의 참여가 저조했던 게 마음에 남아있다. 지난 10년간 생태문제를 주제로 종교인 모임을 해오면서 석존의 연기적 가르침이야말로 현대인들이 되새겨야 할 생태적 지혜라고 생각해온 나는 이 사실이 더더욱 의아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러면서 중앙승가대학에서 있었던 씨튼연구원 10주년 기념심포지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심포지엄의 주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수행>이었다. 장소도 스님들의 배움터여서였는지 당시에는 청중의 절반이상이 스님들이셨다. 물론 전자와 후자 간에 발생한 차이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남은 의문은 왜 스님들은 깨달음이나 수행과 같은 주제에는 큰 관심을 갖는데 반해, 현대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덜한가 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스님께서 보살(Bodhisattva)을 깨달음(Bodhi)과 역사(sattva)의 합성어로 해석한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스님은 이 책에서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역사의 길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나는 한국불교계가 출세간적 깨달음 추구에 보다 더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혹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먼저 깨달은 후에 세상으로 나가야지 수행이 덜된 상태에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자기 중심적 삶이 되기 쉽다. 그래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중용 제27장을 보면 숭고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면서 동시에 중용을 실천한다(極高明而道中庸)라 하여 깨달음의 완성은 중용을 따름에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군자는 출세간에 머물지 않고 인륜일용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인륜일용 안에 머무르는 것(超人倫日用 而又卽在人倫日用之中)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의미겠다. 나는 진정한 깨달음은 수행과 자비실천의 역동성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수행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실제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며 삶에서 깨달은 바는 다시금 자기수행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에서의 군자상은 유가전통에서만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라기보다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 아닌가 싶다.


불교가 오늘날 세계대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부처님께서 당신 생애의 긴 시간을 자비행에 바쳤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부처님께서 이 시대를 사셨더라면 무엇보다 생태문제와 같은 현대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 안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어떻게 구체화시켜낼지를 예민하게 성찰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을 사는 종교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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