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맑고 경건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듣고 싶어지는 대림시기의 절정에 와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더 기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랑의 씨튼 수녀회 동반자’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편안하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아무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특별한 힘을 얻습니다. 더는 외로이 홀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길을 그분과 함께 동반자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 어둡고 깨어진 세상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동반자’란 영어 단어는 ‘Companion’ 빵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어로 왜 가족을 ‘식구’라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 친히 빵을 나누어 먹는 가족이 되고 길동무 이자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어도 혼자일 때와 함께일 때에 따라 인생의 양상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여전히 고달파도 더는 외로운 삶이 아니기에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늘 길동무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가볍게 해 주겠다, 하시며 오라고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답해줄 수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의탁한다는 의미고 누군가에 의탁한다는 건 삶의 여정에서 결코 혼자라고 느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삶은 외롭다’는 말은 함께 길을 찾는 길동무가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더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을 메꾸려고 많은 것을 찾지만,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 사랑이 아니고는 그 공허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선택받고, 사랑받으며 그분과 동반자로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동반자로 살아가는 여기 ‘사랑의 씨튼 수녀회’ 회원들과 함께 더 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성탄 축일이 가까워지면서 의로운 부부 즈카리아와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요한의 탄생에 대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 드러난 놀라운 소식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을 잉태하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갑니다. 그러기에 예수 탄생 이야기는 바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느님의 계획이 숨겨져 있음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그간의 살아온 수많은 역사의 질곡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여 왔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만이 아는 구원 계획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시지만 제대로 기다리고 깨어 준비한 사람들만이 예수의 오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위하여 오셨지만 모든 이가 예수를 알아본 것은 아니였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 놓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파견되어 길을 닦는 일을 하셨지만, 결국 메시아가 걸어가야 할 길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닦으셨고 선구자로 그 수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제대로 기다려야 하고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비천한 곳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에 대하여 그 하느님의 방식을 제대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유의 방식이 나이라 비움의 방식으로, 높아짐의 방식이 아니라 낮아짐의 방식으로, 강함의 방식이 아니라 약함의 방식으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져 주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유의 방식이고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가장 언약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놀라운 육화 사건 사랑의 신비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던 초 세기 신앙인들의 공통된 믿음이었으며 기쁨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와는 무관한 아주 먼 곳에서 나를 응시하는 분이 아니라 이다지도 추한 곳, 이다지도 작은 모습으로 이 인류와 함께 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실 것이라는 이 희망의 노래가 바로 초 세기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면서도 지켜내고자 했던 믿음과 희망 그리고 기쁨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사랑하시고자 했던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 그래서 복음 성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놀랐고 경탄했고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도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놀라야 합니다. 경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성탄 축일에 우리가 만나야 할 그분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고,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일찍이 교부들이 말하기를 ‘교회는 두 가지 보물이 있다’ 하였습니다. 첫째는 전례입니다. 교회는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집단들과 구분되는 단 하나의 특징은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고 또한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여기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기본은 사랑하는 일이고 용서하는 일이고 나누며 비우고, 베풀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예수님의 꿈인 하느님의 나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며 오늘 세상을 더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리의 봉사 직은 세상에 생명과 희망을 주는 직무입니다. 우리는 남을 높여주고 살리고 키워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만이라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면 우리가 허투루 산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고 싶은 캐롤 송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고 공동체 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 도다.‘ 아시지요? 성가 2번 이 곡이 캐롤송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우연히 몇 년 전에 캐롤 송을 듣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가 책을 놓고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천천히 읽어보니 맞습니다. 틀림없이 성탄 캐롤 송 이었습니다.
3절:
주 하느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을 위해 보내 주시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네
4절
주 하느님 세상에 다시 올 때 내 기쁨 말로 다 못하겠네. 겸손 되이 주님께 경배할 때 그 크신 사랑 내가 알겠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 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 도다 주 하느님.
주님의 재림과 주님 앞에 나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 신앙인의 희망과 노래가 아닌가요?
사실 우리가 성탄을 기다리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들이 ‘하느님 나라’ 그 길을 걸어갈 때 늦추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변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끄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요,. 또 우리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십니다. 따라서 ‘주 하느님 크시 도다’ 3절과 4절은 우리 마음 안에 환하게 떠 있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해가는 우리의 환희의 송가입니다.
지난 세월 살아온 기적 같은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며, 기적처럼 다시 다가올 새해에도 큰 희망을 안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반자의 삶을 다해 살아보도록 합시다. 예수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