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9,18-26]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묵주를 보여준 다음 손에 쥐고, 물어본다) “묵주 있나요?”
(잠시 뒤로 감췄다가 다시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다) “묵주 있나요?”, “안 보셨는데요?”
그래요.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그분이 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지 여쭙는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싶은
이때에 여쭤보는 거에요. “저는 저 자신을 믿어요!”라고 흔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요즘에, 그렇게
보이는 것만 믿고, 드러나는 것만 믿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론 ‘아 그러시군요.’하고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을
듯하지요. 그런 세상입니다.
믿음... 믿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의 두 사람이 나옵니다. 회당장이면 나름 유대인 사회 안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또 하혈하는 여인은 율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 죄인이었겠지요.
분명한 것은 이 둘이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것으로 구원받았느냐. 바로 믿음입니다.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의 삶을 구원하고, 밝혀주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체로키 인디언은 이런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체로키족은 아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산 속으로 가서 혼자서 밤을 지내야 합니다. 소년의 눈은 가린 가리개는 다음날 동이
틀 때 벗을 수가 있고요. 아버지는 어딘가로 가고, 혼자 남은 소년은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야생 동물들의 위협과 숲속의 온갖 으스스한 소리들을 견뎌야 합니다. 밤에는 숲 속이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동물들 소리, 벌레 소리 그리고 초목을 스치는 소리 등이 들리지요.
앞을 못 보는 소년의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 겁니다. 소년은 주어지는 모든 자극으로 인해
엄청난 겁에 질리지만 이것을 참아내면 ‘어른’이 됩니다. 이를 참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눈가리개를
제거하면 그는 ‘비겁한 이’가 되고 어른이 될 수 없지요. 마침내 그 끔찍한 밤이 지나 태양이 뜨고
소년은 눈가리개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보게 되죠. 자기 아버지가 바로 옆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을요.
소년에게 얼마나 무서운 밤이었을까요. 얼마나 끔찍한 밤이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년이 곁에
아버지가 있음 알았다면,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면 과연 그 밤이 그토록 무섭고 끔찍한
밤이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그저 단순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시야를 바꿀 수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나의 어둠의 때에, 그런 위협과 불안의 때에 나의 아버지
하느님 예수님께서 내 옆에 앉아 계심을 믿는 것. 그렇게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인해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 내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혹 세상의 시선에 따라 우리의 이런
믿음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늘 든든한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곁에 있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런 믿음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