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 단풍들을 바라보면서 영생의 희망을 가진 노년도 이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이제 이 아름답기만 하던 단풍잎들마저 떨어져 내리고 생명있는 것들이 다시금 대자연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은혜로운 11월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참된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오늘 성서는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과부라는 이 표현은 단지 남편이 없는 존재로서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물론 구약의 시대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과부라는 존재는 더이상
자식을 보지 못한다는 슬픔과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불행에
처한 사람들로 대표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아나 이방인처럼 취급받는 동시에 율법과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과부의 하소연을 즐겨 들어주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이 친히 그녀들의 보호자와 후견이 되어 주시며 과부의 무력함을 악용하는
자들에게는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까지 경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과부에 대해서는 대단히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과부들은 온전히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긴 신앙인들의 새로운 표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새 보호자요 반려자로 맞이하여 오로지 하느님의 일에만 모든 것을 몰두하게
만드는 하나의 이상적인 영적 생활자로 받들어지기까지 합니다.
단지 과부라는 이름만으로는 분명히 세상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지만 하느님이라는 이
신앙 안에서 과부라는 또다른 이름은 나를 든든하게 후견해주시는 버팀목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더욱
가까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들이 그렇습니다. 이 두 과부의 인생은 분명히 다른
길이었지만 봉헌을 통해서 드러난 그들의 의지는 한 가지입니다.
봉헌은 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입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믿고 맡기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 헌신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시는 것입니다. 천 원 만큼의 헌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 나의 인생이라는 전체의 삶이 온전히 당신께 의탁하고 내어맡기는 그런 헌신을
바라시고 그것을 오늘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이 그 버팀목이요 내가 가진 돈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에 어느 것 하나에서부터도 자유롭기 어렵지만 그래서 늘 가지고 있는 것에 얽매여 살기
일쑤지만 그래서 얼마 남지도 않은 빵을 선선히 내어주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는 이
과부들의 행위는 너그러움의 대명사로 헌신의 본보기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일과 자신의 운명을 더이상 나를 보호해 줄 이 없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한 분,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만 모든 것을 구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자들에게 오늘 여기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들을 통해서 지금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걸고 살아가는 그녀들에게는 분명히 하느님이 여기 살아계십니다. 그녀들은 그 하느님을
명확히 만나고 의지했기에 그렇게 선선히 모든 것을 내어맡길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이것이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과부의 헌금을 보십시오. 그 속에 담겨있는 제대로 된 헌신, 그리고 그 헌신에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께 맡기지 못하는 내 탐욕이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나의 교만이 나를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제 아무리 잘 먹어도 하느님이 없으면 가난한 인생이요 아무리 잘 걸치고 화려하게 꾸며도 하느님이
없으면 참으로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와 나눔을 통해 하느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언제나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