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의 밤
(독서: 사도행전 1, 14 ; 복음: 요한 19, 25~27)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은총의 사건입니다. 다만 은총은 은총을 필요로 할 때, 적절한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 작용하며 드러난다고 봅니다.
예전 돈암동에 거주할 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성모의 밤 행사에 참석하였는데, 그 때 강론을 대신해서 한 수녀님이 자신의 메쥬고리아 순례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수녀님은 자신은 물론 함께 성지 순례를 한 대부분의 신자들도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지만 함께 간 사제만이 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속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모의 밤 행사를 끝나고 난 뒤 그 수녀님에게 따지듯이 사제들은 매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축성하기에 굳이 그런 기적이나 발현을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듬 해, 그 수녀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메쥬고리아라는 곳에 나도 한번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당시 저는 이미 어머니를 여의었고, 입버릇처럼 강론 때 마다 <성모님은 저의 어머님이십니다.>고 표현했었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입술에서 나온 영혼 없는 소리였지, 제 마음에서부터 울어 나오는 자녀다운 사랑의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이시기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자녀인 저는 성모님을 어머니로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모시도록 하셨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다른 신자 분들과 함께 메주고리아 순례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희 일행이 그 곳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새벽 2시경이었습니다. 잠결에 <일어나십시오. 메쥬고리아 야고보 성당에 도착했습니다.>라고 인솔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는 동안, 인솔자가 제게 다가와서 <신부님, 어머님께서 초대해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네요.>라고 제 귀에 대고 말하더군요.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표현은 저에게만 하는 표현이 아닌 일반화된 표현이었더군요. 아무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정말이지 저 자신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벅찬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제 마음 깊이 억눌려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성모님께서 제가 오기만을 그토록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늦었지만 이제사 어머니께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쏟아 내린 눈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울컥합니다. 이 눈물이 바로 성모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었고, 이 눈물로써 저는 성모님을 저의 어머니로 온전히 모셔드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메주고리아 순례 이전 여러 곳을 성지 순례했었지만, 분명 그 곳은 다른 곳과 달랐습니다. 그 곳은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었습니다. 전혀 낯설지 않고 익숙한 곳에 온 듯 포근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까닭은 저를 그토록 보고 싶어 하신 성모님께서 저를 품에 안아 주신 듯한 기쁨과 사랑을 느꼈기에, 모든 순례 기간 동안 모든 곳에서 어머니의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 곳에서 체험한 은혜로움은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랑의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그리워하게 한다고 봅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지금은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지만 잊지 못하고 다만 마음으로나마 그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위로와 위안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이종택이 작시하고 김진균이 작곡한 <그리움>이란 노래를 무척 좋아합니다. 조용히 낭독할까 합니다.
<산 너머 저 하늘이 그리운 것은, 멀고 먼 고향이 그립기 때문, 멀고 먼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향의 어머니가 그립기 때문, 고향의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어머니 보다 더한 사랑이, 더한 사랑이 없기 때문>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세상에 <어머니 보다 더 한 사랑이 없습니다. > <성모님의 사랑 보다 더한 사랑이 없습니다. > 그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사랑이 너무 강렬했기에, 모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머님의 사랑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합니다. 그 사랑의 체험은 어제와 다른 것을 희망하게 하고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방금 들은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이제 교회의 어머니로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짝이신 성령의 충만한 힘을 받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둔 예수님에 관한 기억들을 교회에 다시 넘겨주기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상하기 시작한 교회는 어머님의 증언을 통하여 다시금 이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생생한 기억과 증언을 통하여 사도들은 예수님의 남긴 언행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듯이 우리 역시도 성모님을 우리 가운데 모셔드릴 때 복음의 신비를 보다 깊이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을 직역하면, 요한은 마리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여기서 <자신의 것>이란 <자신의 소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 항상 함께 계신 분으로 성모님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 우리가 어떻게 성모님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담는 그릇이고 지금도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중재자이십니다. <자비의 어머니>이신 어머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이자 연장으로 저희에게 자비를 중재해 주시고 계십니다. 다함없는 마음으로 자비의 어머니께 <자비로운 눈으로 저희를 굽어보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사도 요한처럼 어머니 마리아를 우리 각자의 집에 모셔드립시다. 지금 이 순간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위로의 축복을, 평화와 사랑의 축복을 내려 주시도록 우리 성모님께 다함없는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바쳐드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