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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위령의 날 - 이영수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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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2 20:56:17
  • 조회 수: 3676

위령의 날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며 죽음과 영생을 묵상하는 11월에 교회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모두가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의 염원이 담겨 있는 의미 깊은 일입니다. 그럼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성인의 통공을 드러내는 한 모습이며,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에 깊은 사랑으로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뜻 깊은 날, 지난달에 몇 년 만에 계림동 성당 장례미사에서 했던 강론을 대신 들려드리면서 신앙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행운인가를 다시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믿고 사는 길입니다.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식이지요. 어디에 얽매이지도 않고 또 어딘가 구속당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 편한 것과 내 좋은 것을 누리고 살아도 죄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불안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고 산다는 사람들일수록 대단히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분한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능력도 필요합니다.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만 가지 이름의 보험도, 연금도, 넉넉할 만큼의 은행 잔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령 힘겹게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본질적인 불안이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앞에 서면 나만 믿고 산다고 자랑하는 일은 그야말로 무색하기 짝이 없어집니다.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나의 끝을 모른 척하는 것. 어찌 보면, 비겁한 인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사는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믿고 이 세상을 산다는 일이, 세상 그 어떤 보험으로도 그 어떤 연금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든든함을 지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세상, 나의 젊음, 나의 능력, 나의 소유, 나의 시간... 이 모두는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불안해하며 막으려 들지만, 사실 그럴 재간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사라짐이 그다지 두려운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만을 믿었다면 늙는 것도 불안하고 병드는 것도 불안하고 하루하루 다르게 능력이 없어지는 것도 불안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확실히 믿기 시작하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있고 없음에 목을 매고, 내 손에 없는 것 찾아 청춘을 다 날리고 늙어서는 얼마 되지 않는 그것 지키느라고 아웅다웅 거리며 산다는 세상 사람들의 꼴이 참 우습게 보입니다. 돈으로 지식을 사고, 간판을 사고, 명예를 삽니다. 위선으로 권력을 사고 거짓으로 인기를 삽니다. 헛되고 헛된 짓거리를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인생 자체가 다른 생명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참 없이도 보이고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들이 뭔지 다르게 든든함이 있습니다. 권력 앞에서도, 힘 앞에서도, 돈 앞에서도, ‘자긍심같은 것이 있습니다. ‘긍지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죽음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지만, 하느님을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열리는 첫 시작이 됩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손님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실은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나와 함께 자라고 있는 내 안의 한 그루 나무같은 것입니다. 내가 자라듯 내 안의 나무인 죽음도 같이 자랍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나무가 자라 내 키보다 더 커져버리면 나는 이제 그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쉴 따름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걸작품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어찌 내 삶이 소중할 수 있으며, 죽음이 없다면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완성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꼭짓점입니다.

 

지극히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요, 에너지이며, 삶의 입니다. 죽음을 열고 들어가면 삶이 보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답이 보입니다.

 

레지오장을 지내는 오늘 여기, 아무 말 없이 여기 누워 계신이 할머니께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3자녀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기르셨습니다. 큰 소리 내지 않으시고, 삶이 주는 온갖 고난의 잔을 묵묵히 다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남달랐습니다. 언제나 할머니는 평생을 믿어온 하느님, 보이지 않는 그분께 한 가지를 기도 하셨습니다.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보통 사람 같으면 끝까지 거부하고 부정할 자신의 죽음을 매일같이 정성으로 기도하며 준비하신 할머니셨습니다. 친지들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그 기도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당에 와서 단 한 번의 영성체를 더하시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셨고, 레지오 단원으로서 삶을 큰 행복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은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법입니다.

 

참으로 의롭게, 선하고, 바르게, 조용히 선종하셨습니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참된 신앙인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할머니의 한평생을 지켜온 든든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큰 행운이며, 행복임을 다시 깨닫는 은총임을 고인은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와 영영 이별하시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하여 어머니를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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