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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수녀회

주님 수난 성금요일 수난 예식 (2002년 4월 15일) -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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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6 01:53:19
  • 조회 수: 1523

오늘 우리는 성 주간과 성삼일의 절정인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 신앙의 중심인 미사를 봉헌하지 않고 주님의 죽으심 안에 우리도 함께 머무르도록 초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죽음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의 신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죽음은 우리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슬픔이며, 어느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기에, 모든 인류가 함께 느끼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다른 종교들과 삶의 스승들도 이 죽음의 아이러니를 넘어서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의미와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에서 히브리서는 대사제의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 크게 두가지 의미를 알려줍니다. 우선 예수님에 대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면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라고 소개합니다. 동정(同情)한다는 말은 남의 어려움을 딱하고 가엽게 여기다, 즉 같은 마음을 가지다,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서양 말에서의 compassione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로 오셨는데, 예수님 육화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겨내려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에서 죽음을 없애지는 않으시고, 이 죽음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역시 히브리서가 언급하고 있는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고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인 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일치하셨고, 또한 이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 순명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도 완벽하게 일치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죽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렇고,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인류 공동의 장벽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자신과 연관된 죽음 앞에서는 처절하게 아파하면서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 해버리는 인류의 모습을 볼 때, 오늘 수난복음에서 읽은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유다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모습이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환호하다가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모습,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는 군사들의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 흘리는 성모님과 요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그들중 어딘가에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인류의 죽음을 묵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맞닥뜨리는 인간은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동정과 순명 안에서 인간과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시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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