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 “하느님 얼굴 찾기!” (2021. 02. 28.)
“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라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지내는 오늘, 입당송에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 얼굴은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합니다.
‘얼굴’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기도 하지만, 평판이나, 명예, 체면까지도 포함합니다. 내면의 비추어짐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외적인 생김새,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서 그분의 얼굴을 만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버린, 어쩌면 ‘비정한 아버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들을 버리라고 재촉하시는 하느님은 참 모집니다. 그런데 복음의 내용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버린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역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 역설의 선함을 행동으로 드러내며, 이 역설의 아름다움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역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늘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굽히는 것’, ‘절하는 것’,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는 것’을 배울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굽히지 않을 때’는 언제 무참하게 굽히게 될지 몰라 두렵습니다. ‘절하지 않을 때’는 언제 무시당할지 몰라 두렵습니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지 않을 때’는 언제 강제로 무릎을 꿇려야 할지 몰라 두렵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법을 창세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이야기’---‘하느님의 얼굴’: 푸니엘(공동번역), 브니엘(개혁성경): 비누 브랜드명---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작정한 야곱은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에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래서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홀로’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씨름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홀로 하느님과 독대합니다. 복잡한 그물처럼 우리를 여기저기서 잡아당기고 있는 수많은 관계, 근심, 걱정,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가끔 ‘stop!’을 외치고 조용히 홀로 남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독의 훈련을 통해 주님을 깊이 느끼고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눈을 얻은 사람들만이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 2018년 사순절을 시작하며, 사순시기는 ‘보고, 관상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시기’라고 하셨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며, 우리를 야곱과 같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작은 희생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핵심입니다.
쓰라린 감정으로 채워진 영혼의 불편함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급하게 지나쳐 버림으로써 놓쳐버린 삶의 파편들을 지켜봐야 합니다. 잊지않으려고 빽빽이 기록해 둔 ‘게시판’으로부터도 조금 거리를 두라고 권고합니다. 다정함과 연민을 거부하는 경멸적이고 오만한 시선들을 거두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손안에서 통제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거리를 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삶의 선물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을 약하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져 침묵의 창조적인 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을 고통에 빠뜨리게 하거나, 괜한 짐을 지게 하는 자기소외나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무익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뿌리마저 흔들 수 있는 일의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는 삶의 공허함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다정하심과 좋으심이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굶주림이 더해가는 우리 가족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근심 걱정 대신 가정이 사랑의 학교가 되게 해야 합니다. 미래와 희망을 잃은 우리 어린이들과 청년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을 선물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누구 제외되는 일 없이,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진짜 얼굴을 보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가 원하는 그 하느님의 마라는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 아들의 얼굴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 아들의 얼굴은 또한 우리 이웃의 얼굴 안에서 발견돼야 합니다.
영적인 ‘고독’은 교회적 ‘친교’의 삶 안에서 꽃피울 수 있습니다. 첫째, 철저히 홀로 있어 하느님과 기꺼이 씨름할 준비가 된 자는 만져지고 느껴지는 모든 만물과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며, 둘째, 사랑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있기를 원하는 자는 우리의 모든 이웃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기’(고독)가 없이 친교를 원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진다. 그리고 ‘친교’없이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도취와 절망에 빠진다.
고독을 즐기고, 친교를 기쁘게 이룹시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