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마태오복음 25장)은 다들 잘 아시겠지만 장례미사 때 읽게되는 두 가지 복음 말씀
중 일부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심판'이라는 잣대로 비춰볼 수 있는 복음 중 하나인 것입니다.
복음의 서두는 심판의 때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옥좌에 앉아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심판임을 드러내는 장면이 말씀을 통해 그려집니다. 그러나 심판의 기준이 이 세상의 기준과
완전히 다른 곳에 있음을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끼게 됩니다.
가름과 심판의 기준에는 '사랑'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즉 마지막 날의 기준은 '누가 더 잘났냐? 못났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인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날의 기준인 것입니다.
기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를
위에 놓는 사랑이 아닙니다. 나보다는 하느님을, 나보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내 이웃을, 위에
놓는 사랑입니다. 또한 되돌아올 수 있는 것, 즉 되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전제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 해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도로 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해야한다고
예수님은 루카복음에서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눈에 가시와도 같은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꾸만 무겁게 만드는 사람, 예수님께 여러가지 고통을
가중시켜서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무 말없이 사랑하셔서 끝끝내
구원의 십자가 위에 오르시어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다고, 우리의 사랑은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만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그러기에 말보다는 행동이 뒤따르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하여 사랑은 이래야 한다고 말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진정으로 그
사랑의 행위가 내 안에 육화되어져 나의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하루 중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안에는 분명 내 기준에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 조금
덜 사랑하고 싶은 사람, 사랑을 주는 것조차 아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사람을 만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는 무의식 안에, 그리고 너무 무뎌진 의식
속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렇게 자신의 주변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또 저렇더라'라는 기본적인 잣대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인생을 함께 나누고 살아가는 수도 가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더 경건하게 살겠다고 다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더더욱 씁쓸하기만 합니다.
어떤 구성원이 무엇이 안맞고, 또 무엇이 문제라고 해서 사랑하지 못하며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매가 말이 많아 조금은 시끄러워도, 조금은 조잡하고 어리숙해도, 사툴러 보이고 자꾸 실수를 연발한다고 해도 그 자매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루이즈 드 마리약 수녀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 판단과 심판의 기준을 앞세우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용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 나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삶에서 앞서 언급했던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 배움을 통해 우리의 삶 역시
루이즈 드 마리약 수녀님의 삶처럼 성인의 삶으로 옮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루이즈 드 마리약 수녀님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각자도 '참된 사랑'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