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2025년 10월 12일) - 김경민 판그라시오 신부님(제주교구)

홈지기 2025.10.13 17:40:11

루카 17,11-19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이 말씀으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깨끗해졌다. 이 단순하고도 놀라운 치유는 오늘 제1독서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한 것은 그 어떤 부와 권력, 좋은 물건이나 뛰어난 실력이 아니라 예언자의 외마디였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이 두 사건에서 공통점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치유를,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한처음에 만물을 만드셨던 그 말씀이 다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구원 역사를 굽이굽이 흐르며 끊임없이 일하셨던 그 말씀이 어제도, 오늘도 계속 일하고 계시며 내일도, 그리고 세상 끝 날에도 일하실 것이다. 우리를 지어내신 바로 그 말씀이 우리 삶의 부스럼을 털어내고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신다.

 

이 두 사건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공통점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 길을 가던 중에 병이 낫자 한 사람만 그것을 하느님 말씀의 사건으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였다. 단순 셈법으로 치자면 열에 하나 - 십 퍼센트의 가능성이다.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 한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울타리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던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이 똑바로 겨냥한 밭에서 거둬진 수확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시리아 장군 나아만 또한 외국인이었고,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말씀의 고향과도 같은 곳에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나무라실 때 그 이름을 들이대신 적이 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나병 환자는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고, 꼬집어 말씀하셨다. 이렇듯, 하느님 말씀의 텃밭은 수확이 좋지 않다.

 

이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두 사건의 세 번째 공통점, 이 모든 비효율성을 뛰어넘어 하느님 말씀 몸소 세상 곳곳에서 순종하는 이를 찾아 만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하느님 말씀이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만 싹이 트고 자라는 게 아니다. 햇빛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리쬐고, 비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듯, 하느님 말씀도 무차별로 떨어지고자 하신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말씀은 손안에 든 씨앗이라기보다 손에 움켜쥐면 빠져나가려고 펄떡펄떡 뛰는 생선 같다. 우리 곁에 얌전히 앉은 강아지라기보다 아예 길이 들기를 거부하는 야생의 짐승 같다. 부드럽게 우리 뺨 위에 내려앉는 바람 같다가도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할퀴고 지나가는 태풍 같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말씀 자체의 힘 때문이다. 말씀이 날뛰기 때문이고 말씀이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사건이 되고자, 사건의 풍파를 일으키고자, 사람과 삶을 뒤흔들어 깨우고자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건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물로 머물고자 하는 것은 우리다. 흔들어 깨우는 손을 물리치며 한사코 움직이기를 거절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아 안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말씀의 힘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린 저 사마리아 사람과 반대편 길을 걷고 있을 때가 너무도 많다.

 

첫째 독서를 들은 다음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우리의 대답이 이 성당 안에 울려 퍼질 때 우리 마음도 거기 있었는가? 둘째 독서에도 같은 환호로 대답했을 때 우리 정신도 같은 감사의 길을 걷고 있었는가? 말씀의 산 정상에 있는 복음 선포에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는 특별한 환호를 바쳐 올렸을 때, 우리의 두 눈도 그분 얼굴을 마주 뵙고 있었는가?

 

이 물음들은 우리가 응당 해야 할 바를 다했느냐는 도덕적 성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앞서 첫째 독서와 복음 사이에 세 가지 공통점을 짚었다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차이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말씀-몸소-현존하심이다. 복음은 더 이상 예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전례의 모든 환호, 특히 말씀 전례의 환호들은 우리를 바로 이 지점으로 이끈다.

 

사건이 되시고자 하는 말씀이 가장 먼저 몸을 입는 순간은 독서자의 선포와 듣는 이의 환호다. 말씀 전례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몸이 된 이들이 나중에 성찬 전례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체는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만나시는 순간이다. 말씀을 먹어 그리스도의 몸이 된 내가, 몸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받아 모시어,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완전한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이 가슴 떨리는 신비 앞에서 다른 모든 말은 사라지고 가장 짧은 신앙 고백 하나만 우리 입술에 남을 따름이다 - “아멘.”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자신의 영혼 전부를 구부려 맞이하는 이에게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도 장황하지 않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분 입에서 나오는 이 말씀을 듣게 되기를 빈다. 말씀이 살이 되고 사건에 우리도 협력할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