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주위에는 온갖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만물이 그 찬란함을 드러내는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마음 깊이 동참하며, 찬란한 부활의 기쁨을 향한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서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시작하려 한다.”
바오로 사도의 힘찬 외침도 들려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그 얼마나 탈선이 많았습니까!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왔건만, 그 얼마나 무례가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과거를 잊으시고 언제나 우리 안에서 새 일을 시작하려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고통이 있고, 정말 내 뜻대로 안 되는 아픔이 있고, 아무도 몰라주는 눈물을 쏟을지라도, 그 모두는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이 오늘 이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로 이것. 하느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이제 답을 해야 할 사람은 우리 모두입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게 분노케 하는 것은 경건한 이들의 율법과 힘 있는 자들의 위선입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나약함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나약한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선한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연민은 고통을 나누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 연민을 여자와 나누십니다. 그 여자의 고통으로 들어가십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죄인들의 친구요, 용서와 자비의 아버지를 매일같이 부르짖었던 예수님의 자리는 바로 여기였습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사랑은 자비입니다. 용서와 자비,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또한 정의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랑은 삐뚤어진 사랑, 엇나가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 연인은 분명히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일만 남아있던 그녀는, 떨고 있던 그녀는 지금 막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무엇인가 회개를 이루어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저 무상으로 일방적으로 당신 편을 드신 예수님 덕분에 그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의 값은 결코 공짜가 없습니다. 용서의 값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돌아가거라.” 오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단죄하거나, 용서를 베푸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중심에, 우리 마음 한가운데 우리의 미래를 열어 재치고 다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가거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짧은 말씀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지나간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죽이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악인과 선인, 죄인과 무죄한 사람의 도식을 깨버리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한 죄인이며, 모두가 용서가 필요한 나약한 자들임을 일깨우십니다. 하느님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고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사랑으로 모든 생명을 굳건히 떠받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죄를 용서하며, 모든 종류의 죽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오늘 복음은 여기서 끝이 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녀는 분명히 간음죄를 저질렀고, 그녀는 그 죗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죄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그저 한 말씀에 모든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녀를 단죄하지 않으신 대신, 그녀의 죗값을 예수께서 몸소 그녀 대신에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녀의 죄 때문에 피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죄의 대가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 후에 베풀어지는 정의는 무죄한 사람의 속죄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그렇습니다. 무죄한 사람만이 단죄를 내릴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은 고문을 당하다 결국 예루살렘의 불결한 언덕 위에서 죽음을 맞으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예수님을 통해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 용서, 양선, 친절, 온유, 빛과 진리입니다. 그분은 심판하거나 단죄하려고 오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분은 각 사람에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될 수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오셨습니다. 용서는 희랍어로 위험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사람들을 데려오고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다고 합니다. 사랑은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줄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자비는 자비를 낳고, 심판은 이깁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잘못하지만,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이번 사순절 마지막,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자비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고, 세상이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새 일을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지난 일을 잊고 이제 앞을 보고 내달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