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제 1 독서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되어 행복하기를 바라셨고,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속 이어가도록 짝지어 주셨습니다. 결혼과 가정 제도는 하느님이 마련하신 일이기에 신성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살아가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수도공동체, 수도가족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 마련하시고 계획하신 일이기에 신성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사실 가정 혹은 가족이란 개념은 하느님이 계획하고 이룩하신 인류 공동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며, 우리는 가족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생활과 수도생활은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성소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디서나 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가 이제는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서로가 서로 잘 알고 어울리며 이웃으로 지냈습니다. 요사이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며 지내는 것조차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작은 교회라 불리는 그리스찬 가정과 우리 본당 공동체와 우리 수도공동체가 이 긴장과 불화의 세상 안에서 화목과 친교의 삶을 살아내도록 불림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직책을 받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당에서 신부님들은 오늘 복음성서를 통해서 혼인과 가정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나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은 여기, 우리에게 수도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알아들어도 무리가 없는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요사이 우리는 가정이 작은 교회라 합니다. 그렇다면 수도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이 교회 공동체이며,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오늘도 이 수도공동체가 삼위일체를 닮은 사랑의 공동체, 즉, 교회가 되어 세상의 구원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중한 만남을 산산이 갈라놓고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함께 살아야 하는 결혼생활이나, 수도생활이 사람의 힘으로 사랑이 지탱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고 이끌어 주셔야, 두 사람의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이 처음 사랑에 접속되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 되게 하십니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음은, 하느님의 근원적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바로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으로 나아가 전하려는 것도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불러 세상에 하느님의 새로운 집, 새로운 공동체를 지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결혼이고, 수도 공동체이고 본당 공동체이고, 우정이며 수많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두 사람을 깊이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의 반사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든, 친구사이든, 수도공동체의 구성원 이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전달하는 반사체이고 소리인 것입니다.
우정과 결혼과, 다양한 공동체는 모두 방식만 다를 뿐 모든 사람을 품으시는 하느님의 근원적인 사랑을 서로에게 들어내 줍니다. 그래서 모든 공동체의 특성은 어린이처럼 받아들이고 나눔과 섬김과 용서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돌보며, 상처와 약점을 드러내는 자리이고, 용서받고 용서를 베푸는 사랑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셨던 말씀을 다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뷴의 수도회 카리스마가 관상을 더 지향하든 활동 생활을 더 지향하든, 여러분의 과업은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전문가” 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나 쉽지 않다는 것을 저는 체험으로 압니다만, 공동체 생활은 마음의 양성을 위한 섭리적인 토양입니다. 아무런 갈등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몰이해가 생기면 그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자비와 인내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지켜 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가정을 지키고 우리의 공동체를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사랑에 대한 글 중 몇 구절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이 그대를 향해 손짓하면, 그를 따라가라. 그가 가는 길이 가파르고 험난할지라도, 사랑이 날개를 펴서 그대를 안으면 그에게 안겨라. 날개깃 사이에 숨겨진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속삭일 때, 그대를 믿어라. … 사랑이 그대에게 왕관을 씌워 줄 때가 있듯이, 그대를 십자가에 못 막을 때가 있으리라. … 마치 곡식을 단으로 묶어 거두리라. 도리께로 두드려 그대를 벌거벗기리라. 체로 처서 그대의 겨를 걸러 내고 맷돌로 갈아 희게 하리라. 그대 안의 덩어리가 깨지고 부드러워 질때까지, 그대를 반죽하리라. 그런 다음에 거룩한 불로 그대가 구우면, 그대는 비로소 하느님이 베푸는 쓰게 될, 성스러운 빵이 되리라. … 사랑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만족한다. … 그대들이 사랑할 때 ‘하느님은 내 마음속에 계신다.’ 하고 말하지 마라. 그보다는 ‘나는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다.’ 라고 말해라. 또한 그대들 자신이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대들이 자격 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이 그대들에게 길을 지시해 줄 것이므로, 사랑은 바라는 것이 없다. … 다만 사랑 자체를 채울 뿐.
금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을이 시작되는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성모님을 닮아가는 한 달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