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11월 26일) -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제주교구)

홈지기 2023.11.27 00:05:45

마태 25,31-46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왕, 임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백성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얻은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지도자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왕권의 사용은 꽤 까다로운 철학 또는 관습의 지도를 받았다. 어느 시대나 정치 철학이 있어서 군주의 통치와 자세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력에 법적 제약이 있는 것처럼 군주국가의 왕권에도 한계와 테두리가 있었다. 그런 제약과 테두리를 마음대로 넘어서면 민주국가에서도 독재자가 나오고 왕정에서도 폭군이 등장한다.

 

인류 역사의 오랜 흐름 속에서 수많은 왕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백성의 삶을 염려하며 덕으로 지도하는 어진 왕들도 있었으나,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한 왕들이 더 많았다. 권력 유지를 위해 가족들마저 무참히 살해했던 왕들도 적지 않았다. 왕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왕 노릇 하는 데만 심취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하늘처럼 쌓기 위해 땅을 이용했고, 이 땅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이들의 소망과 기원을 불의한 폭력으로 짓눌렀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서로 죽이고 이겨야만 살 수 있는 살벌한 전쟁의 분위기를 조장했다.

 

왕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교훈과 선입견이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강하게 자리 잡은 가운데, 교회는 오늘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낸다.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왕일 뿐 아니라 온 우주 전체의 왕이라고 대범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독서 본문들은 교회가 선포하는 이 진리를 세상을 위협하는 사자후처럼 내뿜지 않는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이 본문들에서 힘없는 이들을 억누르고 재화와 자원을 독차지하는 왕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왕이신 하느님은 옛날 옛적부터 자기 양 떼를 보살피는 목자 같은 분이셨다.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을 찾아 도로 데려오고, 다치고 아픈 양은 회복시켜 주는 그런 분이라고, 예언자가 알려준다. 덧붙여 그 왕께서 끝까지 굴복시키시고 파멸시키시는 대상은 악인이나 죄인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죽음이라고, 이방인의 사도가 전해준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임금은 아니다. 그분은 분명 심판자의 면모를 지니고 계시다고 오늘 복음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온 누리를 다스리고 심판하실 분의 손에 들려있는 잣대는 바로 사랑이다.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 그것이 그분 나라에 들어갈 때 제출해야 할 우리 삶의 최종 보고서이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서로 발을 씻어주고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가난한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들고 괴로움에 신음하는 사람을 주님 모시듯 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부와 권력, 명예와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갈망에서 참행복을 찾는 사람이 우러름을 받는다.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이 다른 이의 모범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구체적인 방식이다.

 

이제 다음 주면 대림 시기를 시작으로 새로운 전례 주기가 돌아온다. 사랑으로 가득 찬 빈손의 임금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로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한다. 우리가 진실로 서로 사랑하며 앞다투어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때, 사랑 그 한 가지만을 입고 헐벗은 몸으로 오시는 우리의 왕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왕이 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실제로 왕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지만, 임금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맨몸 빈손으로 세상의 악을 누르고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오늘 우리 마음에 되새기며,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신 분이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분 발 앞에 내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