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추모미사(2023. 5. 30) - 박상훈 신부님(예수회)

홈지기 2023.06.04 18:40:12

 

 

 

 

 

이태원참사 추모미사

 

예수회 박상훈 신부님

 

참사 200일이 또 흘러간다. 그날 진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 좁은 골목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생을 마쳐야 했는지,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런 참사를 겪고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안전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은 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있다.

 

얼마 전 잡지 「시사인」에서 참사 희생자 여섯 분의 부모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비극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보도했다. 한결같은 질문이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지? 잡지 인터넷 판 댓글창이 닫혀있는 것을 보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명의 가치를 증진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억상실과 무감각에 빠져 있는지 알게 된다. 생명이나 존엄, 평화, 정의 같은 낱말들은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단어만으로는 항상 비어있다. 우리가 거기에 진심과 염려와 행동으로 내용을 채워 넣을 때만이 이 단어들은 생동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복음의 핵심은,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인간가치와 존엄에 대한 경탄의 태도”라고 했다. 이 말은, 인간가치와 존엄은 생명을 근저에 놓고 있으며,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사실 인간생명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일 터이다) 인간의 삶을 복리와 행복으로 이끌려는 노력이야말로 복음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인간 공동체의 존엄하고 평등한 일원이기 때문에 이 일에는 예외가 없다.

 

좁게 나누는 마음 없이, 누구를 참으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일이 무엇일까. 자비와 공감의 힘, 아니겠는가. 공감은 빈 말이 아니며 모호한 것도 아니며 동정심도 아니다. 모르는 이, 낯선 이라도 해도(이것이 인간존엄이 부분적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유이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능동적인 태도와 힘이 공감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에 아파하며 민감하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는 길이다.

 

처음부터,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가신 행로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예수의 첫 번째 관심은 다른 이들의 죄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예수에게 죄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거부의 습속, 자신의 고통에만 매몰되는 내밀한 태도를 뜻한다. 다른 이들의 고통 (여기에는 원수가 겪는 고통도 포함한다)에 세심하고 신실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근본적 감수성이 바로 정확히 예수가 제시하신 새로운 삶의 방식의 특징이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같다. 책임과 책무는 원리상 무한하다. 그 범위와 정도가 있다면 바로 타인의 고통이다. 예수님의 방식에 따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느님을 찾는 그 누구나 여기서 면책되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고통이 내게 부담이 되더라도,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도록 도와야 한다. 그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함께 나서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는 이런 공감으로 가득차 있는 공동체이다. 아니라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란 무엇이겠는가?

예수는 사랑을 낭만적이거나 자기연민으로 절대 보지 않는다. 예수의 사랑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분리 불가능한 일치이다. 공감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충돌과 갈등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내보낸다. 미션(missio)이니 사명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하느님에 대해 보다 잘 이야기하도록, 이 사명을 마음에 깊이 간직할 필요가 있다.

 

우리와 관계없는 고통이란 세상에 없다. 모든 이들에게 열린, 특히 약한 이들의 고통에 열린 국가와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지, 고통을 무시하고 망각하며 심지어 모욕하는 권위와 권력이 무슨 쓸모이겠는가. 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절망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때, 정말로 절망이 된다. 새로운 희망을 살아가도록, 기억하고 애도하고, 그래서 저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