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2023년 4월 2일) - 이영수 신부님

홈지기 2023.04.02 23: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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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죽음을 향해서 당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 예루살렘으로 당당하게 왕처럼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되신 마태오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을 기울여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복음의 수난사를 봉독 합니다.

 

우선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의 삶의 결실이요, 완성이었다는 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을 향하여 사셨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 살맛 나는 세상,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자신을 바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타인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예수님의 투신을 표현한 것이기에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사가에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바로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행위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죽은 야훼의 수난받는 종으로서 인류를 살리는 죽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이사야 예언서가 전하는 고난당하는 의인, 야훼 종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50, 6-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53, 7)

 

복음서는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입을 열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는 이사야서의 그 의인이 예수님이셨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실상 그 의인은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은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그분이 어떻게 죽으셨는지 말하지 않고 사실은 그분이 어떻게 사셨고, 그분의 삶의 열매가 십자가의 죽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마구간 구유에 태어나 30년 동안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조용히 살던 고향을 등지고 30세가 되어서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일으키며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대 로마 제국의 압정과 당시 종교의 율법의 횡포 밑에서 비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긍지를 갖게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인 취급당하고, 인간 이하 취급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런데 나자렛 사람 예수는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얽매고 있는 전통과 종교의 질곡에서 벗겨주고, 육체적 고통과 부자유에서 해방선언을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분은 제자들의 몰이해 속에서도, 일생을 두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나눠 가지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은 폭력과 억압, 돈과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요, 자유의 아들 딸임을 거듭 보여주면서 살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과거의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 지를 않았고,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으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해방을 이야기하며 연민과 동정을 지니시고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그 품으로 들어가 사랑받으며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시며 당신도 하느님의 뜻대로 원 없이 인간을 사랑하며 사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권력 있고 높은 양반들에게 불온하기 짝이 없고, 비위에 거슬리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중죄인으로 동족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그분은 그렇게 사셨기에 결국 그렇게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사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향하여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수난사에 비추어진 우리는 누구입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공범자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고,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대 사제 가야파처럼 자신들의 안정과 평안함을 찾는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자만심을 가지고 남을 무시 하려든 우리,

베드로처럼 시련과 고통에 쉽게 마음을 바꾸는 우리,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처럼 마음이 굳어 가난한 이들이 어려움을 몰라보는 마음이 차가운 우리,

그런 우리들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수난사의 마지막 부분, 남을 위해서 죽는 한 의인의 죽음 안에서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구나라고 고백하는 생각이 깊은 백인 대장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을 다하여 십자가를 세우는 자로서 아니라 십자가를 우리도 지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아본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립비 3, 10-11) 

 

오늘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에 의해서만 세상의 구원이 달렸음을 고백하며, 사도 바오로처럼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기꺼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십자가를 우러러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날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