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10월 24일) -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님

홈지기 2021.10.25 19:27:37

 

2021년 10월 24일, 연중 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제 1 독서 이사야 2,1-5.

제 2 독서 로마서 10,9-18.

복 음 마태 28,16-20.

 

 

   일반적으로 꿈과 희망이 가장 큰 시기를 세상과 자신을 잘 모를때,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는 때라고 여겨집니다. 사제로서 삶을 시작할 때 어쩌면 가장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제 서 품을 받을 때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성구를 선택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선택한 성서 구절이 코린토 전서 9,22 의 유명한 말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 든이에게 모든것(Omnibus Omnia)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참고한 것이었습니다. "모든이의 모 든것이 되기 위해 부르심 받고 파견 받는다" 꿈만 크던 당시에도 너무 큰 욕심이 담긴 문장이고, 감당하지 못할 말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다시 서품 문구를 정하라고 하면 아마도 "깊은 구렁 속에서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시편 130)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조직과 단체를 그것을 만든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질 문과 비슷하게 '조직과 단체가 먼저냐? 아니면 그 조직의 목적이 먼저냐?'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닭과 알 중에 뭐가 먼저냐에 관해서는 정확한 답을 하기 어렵지만, 조직과 목적 가운데 서 뭐가 먼저냐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나름의 답을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먼저 입니다. 국민 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사회에 공헌하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회 사가 만들어 집니다. 조직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 그 조직의 목적이 나중에 생겨나는 경우는 별 로 없습니다. 만일 군대가 국민과 나라를 지키지 않고 거꾸로 국민을 향해 그 무력을 오용한다면 그 군대는 마땅히 해산되어야 합니다.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거나, 그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회사 가 있다면 그 회사는 파산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사회이고 상식입니다.

 

   교회라는 단체도 비슷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교회 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마태 28,18-19) 려고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지상명령을 교회가 매일 달성하지 못한다면, 마치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군대나 매일 손 해를 보고 있는 회사와 비슷한 꼴이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지키라고 말하기 전 에 그것을 먼저 지켜가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나 에게 있는 것만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도, 미움과 슬픔도 그러합니다. 그러한 측면 에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재촉하는 말씀 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 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주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이 그분의 자녀로 새롭 게 태어나는 삶을 매 순간 살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기 전에 먼저 내가 그분의 제자로서 그 길을 따르고, 그 길위에서 평화와 구원을 누리고 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자기 성찰과 내적인 고민은 우리의 신앙을 좁은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 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모자람만 쳐다보고, 그 핑게로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있다 는 뜻입니다. 내 믿음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운 때에 남에게 무슨 복음의 기쁨을 전달한다는 것일 까? 세상은 복음이나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없이 도 번듯하게 잘 살고 있는듯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그저 세 상의 여러 조직과 단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개신교 형제들을 포함해 서 세례를 받은 이들이 하나인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믿음만 최고인양, 자기의 인식만 진리인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세례의 의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는 특권의식일 뿐이고, 그분을 닮아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야한다는 계명은 애초부터 안중에 없 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설교에서 아무런 위로와 권위를 느낄 수 없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성직자에게서 특별한 자기 희생과 봉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코로 나 시대를 겪으면서 텅 비워졌던 성당과, 그에대해 너무도 무기력했던 교회와 저 자신을 보면서 점점 두려움과 걱정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 분이 이천년전, 이 땅을 비추셨던 그 복음의 빛이, 여전히 우리를 통해서 이땅에 비추어질 수 있을까? 우리 자신에게 모든 사람이 아니고, 그저 한 사람에게라도 하느님을 알게 할 수 있는 믿 음이 있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이웃에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의기소침 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내가 누군가를 새롭게 세례받게 하지못하더라도, 이미 세례 받은이들 을 격려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비록 죄인이고, 그 죄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옆 사람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고, 슬퍼하는 이가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있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내 가 비록 모든 길을 알고 가르쳐 줄 수 없지만, 함께 길을 찾고 함께 길을 잃으며 함께 헤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희망을 가져 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적인 시민의식이 성숙하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아도 다른이들을 배려하며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상 식과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도 제 앞가림 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 아도 희망할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계획하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신앙이 이 시대에 전해 줄 수 있는게 있다면 아마도, 영적인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주 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보이는게 전부인듯 보이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 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실재가 우리 삶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7항에서 베네딕토 16세의 회칙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 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건과 사람을 만났고, 지금도 그 만남을 이어가고, 그 덕분에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알버트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사는 두가지 방법이 있 다. 하나는 마치 어떤 것도 기적이 아닌것처럼 사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마치 모든것이 기적인 것 처럼 사는 방법이다." 우리의 눈이 매일 보이는 것 너머의 기적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이 웃과 나누는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