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미사 (9월 21일) - 이영수 신부님

홈지기 2021.09.24 00: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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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텅 빈 것 같았던 들녘에 어느새 황금빛 곡식들이 영글어가는 가을과 함께 다시 추석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처럼 형제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나누는 이 명절은 사실, 매일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여 바치는 미사의 반영 같습니다. 이날은 감사와 기쁨과 나눔의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날의 기쁨을 온 가족이 나누면서, 생명을 물려주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조상과 부모님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효심을 길렀습니다. 차례상 대신에 지금 우리는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석 한가위는 이웃과 함께 하는 민족의 축제,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랑의 축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교회의 축일 이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는 뜻깊은 날에 인생의 추수인 종말에 의미를 상기시켜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바쳐야 하는가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의 잘못은 결국 옷도, 하느님도 보이지 왔다는 있습니다. 땅에서 그는 새로운 창고를 지어야 만큼의 넉넉한 사람이었으나 하느님 앞에서 그는 자기 입에 들어갈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가위에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자기 소출을 위한 장구를 지었을 , 차라리 그것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이라 여기고 창고 자리에 차라리 제단을 쌓았더라면, 그리고 재단에서 많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성찬이 벌어졌더라면 수출은 독이 아니라 복이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을 향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대단한 것을 가져도 목숨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인생도, 소유도, 관계도, 심지어 나의 고통마저도 하느님이 주인이십니다. 천년만년 것처럼 내일도 오려니 사는 그것!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왜 탐욕을 부리고 왜 방종을 부리고 왜 게으름을 피우지요? 내일이 또 올 테니까요? 천년만년 살 거 생각하면 악착같이 쥐고 있어야지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은 같은 거라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충만 한 시간을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간 단순한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하고, 반면에 깨어 있음으로 현재에 충실한 삶을 카이로스라고 해서, 초월적인, 충만한, 의미 있는 시간 , 시간보다 때를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며,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와는 대조적이며, 하느님과의 수직적, 초월적 관계로 때, 절기에 개념입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과 인간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안배하고 섭리하는 기회인 때가 되며, 그 일들은 예정된 기능을 수행한 다음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로노스 시간은 한 개인의 인간의 여정에서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다양하게 체험됩니다. 한 시대를 깊이 감지하고 살았던 시인들은 자기 시대가 담고 있는 고유한 특징을 한마디 단어로 표현합니다. 궁핍한 시대, 암울한 시대, 격동의 시대, 잔인한 달로 표현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펜데믹 시대, 우울한 시대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마지막 기회를 믿습니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만한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사도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세상의 시간을 그지없이 반가운 시간, 충만한 시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 신앙의 작품인 전례주년을 만들어 그리스도 탄생 후 2000년의 간격을 넘어 우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여 그분 안에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특히 오늘 같은 날, 교회는 한가위, 추석에 날을 맞이하여 의미 있는 충만한 시간 크로노스를 보내도록 합니다. 부디 이제부터라도 어리석게 살지 마십시다. 시간의 주인이신 그분께 주인의 자리를 잘 내어드리고 사십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 그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물러 주신 한가위 부디 한가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50년을 가톨릭 신자로써 줄기차게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써왔던 시인, 그는 오늘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 주는 은수자의 역할을 한 정호승 프란치스코 그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 한 수를 들려드립니다. 오늘처럼 기쁜 날, 이 시는 사랑 때문에 오늘도 눈물 흘리 시는 예수님이 어리석은 바보 부자에게 들려주는 시처럼 보입니다.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거리에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가마니 장조차 덮어 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이 어려운 시대에 손을 맞잡아줄 사람 하나 없는 그저 쓸쓸하고 슬픈 사람들, 그들도 기억해 주십시다. 아직 남은 우리들 시간에 나보다 더 힘든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도 기쁨이 되어 주는 삶을 살아봅시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던 정호승 시집 제목을 다시 외 보면서 지금 나를 있게 해 주신 모든 조상님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 그 영혼을 위해서도 이 미사 중에 기도 기억해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