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5. 26. - 다해) - 허찬 신부님 강론

홈지기 2019.05.27 04:16:51

부활 제6주일(2019. 5. 26. - 다해) 요한 14,23ㄴ-29

 

오늘 강론은 복음과는 거리가 좀 먼 내용을 가지고서 시작할까 합니다.

학교에 계신 신부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다가 한 신부님이 조현병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도 어떠한 과정으로 정신분열증이 조현병으로 바뀌었는지 몰라 그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대한 조현병 학회에서 2011년에 발행한 [정신분열병 병명 개정 백서]에는

조현병으로의 명칭 변경과 그 뜻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한정신분열병학회는 명칭변경의 필요성에 대하여 간헐적으로 논의해 오던 중 인터넷 정신분열병 환자 가족 동호회 아름다운 동행에서 3,689명의 서명이 담긴 정신분열병병명개정을 위한 서명서를 보내와 병명 개정 청원을 함에 따라 20079월 이사회에서 명칭 변경의 필요성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고 논의하였다. (중략)

 

정신분열병이라는 명칭은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분열이라는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가 매우 심각하여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특수성과 맞물려 환자에게 가해지는 낙인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환자를 진료 현장으로 불러들여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여 그 장해를 줄이거나, 그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정신분열병 학회는 이러한 의학적인 요청과 정신분열병 환자 및 가족들의 시대적인 염원에 부응하기 위하여 정신분열병의 명칭변경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중략)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한자문화권에 속한 국가로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病)이란 명칭으로 인하여 당사자들이 편견과 낙인으로 피해를 받아왔다는 측면에서 매우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1993년 일본가족 협회가 일본 정신신경학회에 명칭변경을 요청하였고 일본정신신경학회가 10여 년간의 노력 끝에 2002년 정신분열병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변경함에 따라 환자에 대한 편견의 감소, 병명고지와 환자동의에 의한 치료의 증가 등 치료 효율성이나 인권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홍콩도 비슷한 사유로 정신병을 사각실조(思覺失調)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중략)

 

병명개정위원회는 또한, 우리말의 최고 전문가 집단인 국어국문학회(회장: 김진영 경희대 국문과 교수)에도 자문을 요청하여 병명개정의 원칙에 맞는 새로운 용어를 찾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김진영 교수는 조현긴완증(調絃緊緩症)이라는 신조어를 새로운 병명으로 제안하였다. 이는 청허휴정이 저술한 선가귀감에 나오는 조현지법(調絃之法)에서 착안하여 명명한 것이다. 청허휴정은 雜阿含經에서 이를 인용하여 기술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 제자의 한사람인 蘇那는 밤낮으로 정진했으나 깨치지 못하였는데, 부처께서 거문고 줄 고르는 법에 비유하여 정진도 너무 조급히 하면 들떠서 병나기 쉽고, 너무 느리면 게을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며 꾸준히 힘써 닦도록 하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깨치게 되었다. 조현긴완증은 현악기의 줄이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하듯이 인간의 정신도 적절하게 튜닝이 되어야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병의 경우 두뇌의 문제로 적절한 긴장유지에 문제가 생긴 질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략)

 

우리말에도 조현이라는 용어가 거문고 현을 고른다. 조절한다는 말이다. 우리말에 정신줄을 놓는다’, ‘신경줄을 놓는다는 마음과 관련된 말이 많은데, 그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하는데, 너무 직설적인 이야기 보다는 비유적인 명칭이 치료적으로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긴장이완의 줄 고르기에서 잘 되지 않으니, ‘잘 안되면 그것을 조절하면 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의 전달도 가능할 것 같았다.

 

 

위의 내용처럼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의 부정적 의미로 인해 그에 대한 용어 개정으로

조현병이란 말이 대체되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조현(調絃)의 사전적 의미는 현악기의 줄을

조이거나 풀거나 하여 원하는 높이의 음으로 맞춘다는 뜻으로 여기서 조(調)고를 조’, ‘

조절하다’, ‘균형이 잡히다’, ‘어울리다’, ‘평균이 되게 하다’, ‘고르다’, ‘적합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정신 줄을 놓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무언가에 압도되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줄을 고르듯이 마음의 줄을 고르다라는 뜻으로 조현병으로

정신분열증의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기타를 연주하려면 줄을 잘 맞춰야하겠지요. 너무 긴장되게 팽팽하게 감아 버리면 줄은

끊어집니다. 반대로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그 상태로 줄을 조현하는 것이 악기 연주에서 중요하다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조현의 길이 필요하겠지요. 소임에 지쳐 있어 나의 줄을 너무 풀어 놓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내가 맡은 소임에 열정이 넘쳐 줄을 너무 팽팽하게 감아 버렸던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조현병이라는 우리 말 명칭과 함께 영어도 살펴보았습니다. 영어로는 schizophrenia라고 합니다.

그리스어에서 가져온 말로 schizo갈라지다는 말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진 것을 말합니다(마태 27,51; 마르 15,38; 루카 23,45

). 이때 이 schizo(εσχισθη)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schizo

둘로 갈라진 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phrenia는 그리스어로 ()’이라는 뜻이니

schizophrenia라는 어휘가 주는 느낌은 좋지 않지만 말 그대로 표현하자면 정신이 분열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schizo는 파편화(fragmentation)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편화란 수류탄이 터지면 그 파편이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조각나서 절단된 상태를

말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의자를 들고 유리로 된 창문에 던집니다. 그러면 창문은 산산조각

나면서 박살이 나지요. 그때 깨진 창문의 유리 조각들을 파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정신의학에서는 분열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파편화된 분열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파편화된

조각 안에서 본인에게 있어 좋은 것(good)은 받아들이지만, 나쁜 것(bad)이라 생각되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니 상대방에게 투사(projection)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분열된 사람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며 상대방을 비난하고 사랑 없이 비판하게 되는데, 그 화살은 너무나도

날카로워 그 화살을 받은 사람의 마음 또한 쉽게 분열되어 같이 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분열된

사람은 같은 공동체에 있는 사람을 나쁜 적처럼 비난하고 공격함으로써 공동체를 분열시켜

놓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통합인데, 이러한 통합을 거슬러 서로가 서로를

나쁘다고. 그리고 서로를 틀렸다고 비난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분열되어 깨지게 되지요. 이때

지도자(leader)가 참 중요합니다. 만일 지도자가 분열된 마음을 안고 공동체를 대하다 보면

공동체도 분열된 모습을 띠게 됩니다. 이는 마치 성경에 되돌아오는 악령이야기와도 비슷합니다.

 

 

루카 11장 되돌아오는 악령 (마태 12,43-45 참조)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마태복음 1245절 끝에는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로 끝납니다.

분열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깨끗하게 통합되어 있는 공동체나 상대방을 보면 그렇게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된 공동체를 견뎌내지 못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통합되어 있는

공동체나 상대방을 파괴하고 분열(schizo)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열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엷은 미소까지 띠게 됩니다.

 

만일 이렇게 분열로 나아가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 안에 사랑은 없습니다. 말은 그래도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랑한다는 핑계만 댈 뿐이지, 서로가 서로를 분열시키려는 마음 밖에 없는

공동체가 됩니다. 마치 분열의 마음을 가진 좀비한테 물려서 나도 분열의 씨앗이 자란 좀비처럼

되어간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에서 보면 좀비가 다른 사람을 물어서 또 다른 좀비로 만들 듯이

분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분열의 씨앗을 심어주어 그 씨앗이 자라도록 해 줍니다.

 

보통 회의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 뒷담화나 상대방을 비난하는 사람을 통해 이런 분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명만 있어도 공동체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이런 뒷담화를 통해 나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상대방 탓을 하며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늘 반성해보곤 합니다. 이런 분열의 마음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분열의 마음을 욕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끝없이 자신의 것을 채우고자 하는 탐욕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밑이 깨져서 구멍이 생긴 항아리이기에 아무리 붓고 부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을 모르고 늘 항상 비난의 목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교황님의 [사랑의 기쁨 100]에서는 비난만 하는 사람의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이와의 참된 만남에 열려 있으려면 다른 이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다른 이의 단점과 실수를 서슴없이 지적하는

부정적 태도를 지닌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부터 시작해서 계속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잘 읽어 보면 분열이 아닙니다. 통합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라며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일치를

이야기하십니다. 더구나, 이러한 하나 됨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더욱 더 말씀을 살아 있게끔 만들게 해 주셔서 그 생동감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화를 빌어주시지요. 통합된 사람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열된 사람이

분열 양상으로 인해 쪼개지고 갈라졌기 때문에 어디에도 기능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리창도 쪼개지고 갈라져 파편화되면 어디에도 쓸 수 없지요. 쓰레기통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의 통합된 유리창만이 창문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산란해지는 일이 없이, 겁을 내는 일이 없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되어 평화를 누리며

나아갔으면 합니다. 매번 기도합니다. 통합된 성숙함으로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해 달라고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하느님의 평화 가운데 머무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