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일, 주님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삼왕내조 축일'이라 했지요. 지금은 그 의미를
드러내는 뜻으로 '주님공현'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에게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비록 이스라엘에서 나셨지만 온 인류의 왕이요, 메시아로 예수님께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대림절로 시작해서 성탄시기, 그리고 마지막 공현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계속 '예수 성탄축일'이
우리에게 남기고 가야 할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적어도 오늘 이 구유 앞에서 우리는
관람자나 방관자, 구경꾼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은 한 가정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름 없던 한 여인이 엄마가 되고, 한 남자가 하루아침에 아빠가 되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대변혁이고 대전환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아기의 탄생으로 이 세상은 새로운 전환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맞이합니다.
권세있고 강한 자가 쫓겨나며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되돌리시고
낮고, 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들어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진정으로 기념하며
그리고 오늘 공현축일을 진정으로 참여하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 만물의 대전환에 함께
참여하며 몰입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역할의 인물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한 아기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요?
이제 조용히 성탄시기를 마감하면서 마지막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님을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한 아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약함의 표, 작음의 표, 비움의 표, 짐의 표, 낮아짐의 표, 이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표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표라는 것입니다.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구유와
저 십자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말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로부터 이 겸손과 작음과 가난과 비움과 포기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은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늦기 전에 우리가 말구유 앞에 머리를 숙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찾고 자기 생각을 하느님보다 앞세우며 살아왔던 내가 이제 하느님을 앞세우고 이웃을
섬기며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추구해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더 낮은 곳으로 마음을 비우고 내려가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성탄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강하고 능력있는 자들이 용기를 잃고 두려워 피하고자 하는 장소는 단 두 곳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구유와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힘있는 권력자들는 감히 구유에 올 수
없습니다. 헤로데 왕도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유 앞에서 높고 낮음의 의미, 강함과 약함, 부유함과 가난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제대로 기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모든 권세와 명예와 인기와 허영과 교만과 이기심을 구유 앞에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그는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고 낮고 비천한 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경건하고 하늘의 뜻을 물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된 이 구유의 드러남은
지금도 하느님을 찾으며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별처럼 빛이 납니다. 세상 만을 쫓는 시선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빛이고 성공 만을 바라는 시선으로도 결코 볼 수 없는 빛입니다.
사실 이 빛은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우리가 성탄과 주의 공현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들이 하느님 나라,
그 길을 걸어감에 있어 늦추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변하지 말 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끄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 환하게
떠있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은혜로 주신 이 새해를 기쁘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본회퍼의 성탄 시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이 세상의 기쁨, 눈부신 햇살 바라보는 기쁨,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지나간 날들 기억하며
나의 삶 당신께 온전히 드리렵니다.
어둠 속에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임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 나라 확장되어 갈 때,
모든 주님의 자녀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그 우렁찬 소리 듣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