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문 <독일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홈지기 2018.06.14 01:57:04

 

1948년과 1949년 두 개의 정부가 출범하고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그리고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함으로 독일민족은 분단되었다하지만 독일개신교회와 독일감리교회 등

교회는 여전히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였으며 교회의 날 행사도 계속해서 양 지역을 아우르며

번갈아가며 개최하였다함부르크(1954), 라이프찌히(1954), ·서 베를린(1951) 

그리고 베를린장벽 건설 직전 서베를린(1961) 행사까지 양 지역의 교회가 연합하여 교회의 날을

개최하였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양교회의 교류가 현실적으로 봉쇄한 이후 비로소

·서독 교회조직이 분리되었다.

 

70년 넘게 갈라져 지내온 북녘 땅은 230여 개 크고 작은 단위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한 주민에게는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것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남녘 땅을 밟는 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한반도와 같이

분단을 체험한 동 서독은 냉전이 격렬하던 1964년부터 매년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갔다비록 은퇴한 연금생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4주간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체제나

이념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으로 평화를 한껏 누렸다그들이 쐰 평화의 바람은 훗날

통일 독일의 미래를 맞아온 마중물이 됐다이렇게 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밑거름 됐다.

 

동서를 나누던 분계선으로 인해 사람의 손이 닿지 않던 비무장지대의 자연은 수십년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어 자연스레 원시림 그대로 보존돼 생명의 못자리가 됐다

그리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활동을 하고 있다이런 활동은 유럽 전체로

파급돼 2003년 유럽 그린벨트 협력 사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고독일 정부의 자연보존을 위한

정책들은 2010년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확산되면서 자연보호를 위한 다양한 기관들이

생겨나는 결실을 맺었다. “통일이 언제 될지 아무도 몰랐다.” 독일이 통일되는 그날까지 동서독

국민 누구도 갑작스럽게 닥칠 통일을 예측하지 못했다하지만 통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다서독 정부는 잠시도 중단 없이 동독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관된 정책을

펼쳤다서로는 언젠가는 함께해야 할 한 형제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서독은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많은 정책으로 동독을 도왔다.

 

*** 석방거래사업

서독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3년부터 통일되기 직전인 1989년까지, 1인당

평균 8000마르크를 주고 3만 1775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왔다이 정책을 교회에서 했기에

 교회사업 B’라고 부른다서독 정부가 예산을 지출하되동독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대리자로 내세웠기 때문이다이 사업에 총 23.7억 마르크의 엄청난 재정을 지원했다.

 

*** ‘교회사업 B’

이산가족을 동독에서 서독으로 영구 이주시키는 사업으로이 사업에는 석방거래’ 보다 훨씬 적은

예산이 들어갔다같은 기간 총 85만 5130명의 이산가족을 서독으로 이주시켰다이 정책에는 

10.9억 마르크의 재원이 들어가 9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자유를 찾았다서독은 동독 지역에

아낌없는 지원을 했는데 총 219억 마르크로 100억 달러에 이른다이렇게 서독교회는 동독교회를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정책을 펼쳤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룬 평화통일 – 우리는 한 민족

독일 통일 과정에서 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특히 동독 개신교회는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이교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이사야 2,4) 라는 슬로건 아래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평화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서독 간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평화기도회를 이어갔다

 

교회 이름 아래 이런 모임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동독 사회에서 독특한 교회 위상 때문이었다

동독교회는 1948년 구동독 튀링겐 주 아이제나하에서 결성된 독일 최대 개신교회 연합체인

독일교회연합에 가입한다이는 독일의 분단 상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이에

동독 정부가 교회 탄압정책을 펼쳤지만 인구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인 상황에서 교회와 싸움이

안되었다그후 동독 정부는 교회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가 사회정치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니 대표적인 곳이 성니콜라이 교회였다.

 

1989년 10월 9역사적인 날이 닥쳤다평화기도회가 계속되면 유혈 진압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 있었지만 성 니콜라이교회에서 열린 평화기도회에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평화와

인권 신장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 후 교회 밖으로 나섰을 때 교회 밖 광장에는 7만여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평화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행의 자유를 요구했다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평화 시위 구호는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그리고 우리는 한

민족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베를린 장벽 붕괴되던 날(1989.11.9.)이 오기까지 즉 베를린장벽 붕괴를 유발한 구동독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교회의 월요기도회가 통일에 기여한 독일교회의 실제적 역할이었음은

분명하다비폭력 평화혁명에 의한 독일통일의 기폭제가 된 월요기도회의 저변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1945년 종전 후부터 통일을 이룬 1990년까지 양 체제하의 독일민족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민족하나의 교회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제시한 교회의 역할이 있었다.

 

독일개신교회는 나치 하에서 교회가 철저히 항거하지 못하고 불의에 침묵한데 대해 회개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선언함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민족 앞에 역사청산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독일감리교회 역시 1945년 12현재 독일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은 제 3제국(나찌)

범죄에 대한 결과임을 지적하는 죄책고백을 한다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자신들의 과오를

참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이러한 교회의 죄책고백이 독일통일의 영적인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여긴다.

 

 

 

철의 장막 시기에 양 지역의 교회는 에큐메니칼 교회연합을 통해 하나 됨을 추구하였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라는 기치로 1981년부터 동서 양 교회에서 매년 11월 열흘간 집중적으로

전개된 평화기원운동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도

평화기도회를 기원으로 한다. 1989년 가을 동독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이

비폭력 평화혁명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기 동서 양교회의 지속적인 평화운동에

기인한다.

  

 

사반세기 전부터 사회통합과정에 들어선 독일에서도 아직도 구 동서독 지역 간 문화적 갈등요소가

상존하는데 우리 민족은 여전히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서 70년을 맞는다우리는교회는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 마틴 니묄러의 고백. ***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인 목사)

 

나찌가 공산당을 끌어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야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끌어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야 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야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야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끌어내자,

아무도 없었다,

저항할 수 있었던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