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튼연구원] 종교가 다른 이웃을 사랑하려면...

홈지기 2015.08.04 05:58:29

**사목정보 2014년 4월호 게재된 글입니다. 종교대화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하여 공유합니다.


종교가 다른 이웃을 사랑하려면...

최현민 수녀(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원장)

 

 

    1. 다른 종교인이 내 이웃?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다종교상황 곧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등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적 문화를 지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과 다른 세계관과 구원관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진정한 의미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물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답해야 할 다음 질문과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라면, 과연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구원의 손길을 뻗치실까? 하느님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까?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중 우리보다 더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살진 않지만 선한 지향을 갖고 살아가는 이웃종교인들,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나?


종교적 진리는 삶의 방향키와도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듯, 이웃종교인들도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 창시자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절대적으로 여기듯 무슬림들에게는 쿠란이, 불자들에겐 팔만대장경이라는 경전이 있다. 이렇듯 각 종교인들이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각 성전의 언어들은 그 표현이나 내용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는 교의적 차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존재양식에 대해 말하는가 하면,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諸行無常)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며(諸法無我) 고통과 번뇌로 가득차 있다(一切皆苦)는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가르친다.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 무함메드는 알라의 사자다라는 이슬람교의 신조 역시 그리스도교의 교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각 종교전통에서 내려온 언어적 표현들만 본다면 서로 다른 진리를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적 교의를 믿는 이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2. 신앙과 신념(믿음)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축적된 전통과 신앙으로 나눠 설명한다. 축적된 전통은 각 종교 경전이나 교리 의례와 같이 각 종교사 안에서 전래되어온 믿음 체계를 말한다. 그러기에 축적된 전통은 각 종교마다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한 종교 안에서도 시대 장소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런 점에서 축적된 전통은 각 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감에 있어 경계를 설정하는 기능을 해왔다.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른 종교보다 이 면에서 더욱 뚜렷한 경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이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는 자칫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성 곧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이 표현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요,사랑고백이다. 마치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많지만 어느 특정 여인에 대해 애정을 표현하듯,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예수야말로 나의 구세주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축적된 전통을 통해 갖게 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헌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faith)신이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에 대한 신념(belief)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해 신앙은 초월적 세계와의 깊은 영적 교류이기에, 정의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철학적으로나 인식적인 세계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신앙이 무엇이어 왔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신앙이 무엇이어 왔는가라고 묻게 된다면 우리는 종교사 안에서 드러난 신앙의 자취를 추적하게 된다. 스미스는 세계종교사 안에 드러난 언어적 표현이나 의례와 도덕을 통한 행동양태, 각 종교가 지닌 상징체계나 공동체의 삶을 통해 드러난 신앙이 지닌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세계종교사에서 드러난 신앙도 결국 각 종교인의 신앙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각 개인이 초월의 세계에 대해 눈뜨임으로써 드러난 신앙의 역사가 바로 세계종교사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무슬림들은 코란을 통해서, 불자들은 불법승 삼보(三寶)를 통해 초월의 진리를 자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인간이 초월의 세계에 눈뜨이는 경험에 바탕을 둔 인류의 고유한 자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스미스는 보편적 신앙 혹은 신앙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이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belief)의 세계를 넘어 신앙의 차원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이웃종교인과 깊은 영적 교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 머문다면 언어적 표현이나 의례나 상징들로 둘러쌓인 축적된 전통의 차이를 넘어서 이웃종교인들이 지닌 종교적 진정성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3. 사랑으로 품어안기

 

이렇듯 신앙의 차원에서 다른 종교인을 수용한다 해도 실제 삶 속에서 함께 살다보면 서로 부딪힘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데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께 이웃 사랑에 대해 물었을 때 그분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루가 10,25-37)를 들려주셨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철천지 원수지간인 민족적 감정을 뛰어넘어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구해주었다. 민족적 적대관계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지금 자신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 사람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눈과 마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답은 하나다. ‘무조건 사랑하기. 그건 사랑보다 더 위대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상대를 원수인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상처투성이로 있는 상대로 품어안게 만들었다. 사마리아인이 지닌 측은지심이 바로 예수가 자신을 통째로 던질 수 있었던 사랑의 정수다.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사회나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선입견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이처럼 상대방을 향한 마음의 벽을 허무는 힘이 사랑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신과 인간 간의 엄청난 간격을 허무셨다. 이 사건을 사랑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드러내신 그 놀라운 사랑에 목숨을 건 이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은 결코 둘이 아니다(不二). 우리가 종교가 다른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남기신 사랑법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하신 예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