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수 신부님의 미사 강론 중
내가 약해지고 내가 힘 떨어질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지켜봄”, 언제나 옆에 함께 함, 그것이 어머니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힘입니다.
능력이 있어서 위대한 존재가 어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무능함을 통해 언제나 그 위대함이 드러나는 존재가 어머니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사실 마리아라는 인물이 인간으로서 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천사가 나서서 ‘당신이 아들을 낳을[터인데] 그 아들은 큰 인물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고]. 야곱집안을 영원히 [다스리리라]……. 하셨지만 여기에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도,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습니다. 그것이 마라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저 무력해지면 됩니다. 인간 마리아가 무력해지고 또 무력해 질수록 마리아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이 일하실 수 있어집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워드린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지니고 있는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마리아의 무능이 아니라 세상의 유능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잘나 본당 안에서 일을 하고, 내가 잘나서 봉사를 하는 줄 알고, 내가 뭘 해야만 잘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줄어듭니다.
천사의 부르심을 받고, 마리아는 자신이 그 명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일 말고는 하나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 마디는 우리가 해야 하는 신앙의 모든 언어, 오든 것입니다. 사실 이 대답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딱 이 대답만을 가장 완전하게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을 평생에 걸쳐 살아내셨습니다. 인간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 그것은 마리아의 위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의 무능함 이였으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게 만든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은 자유로웠으며 하느님은 그런 마리아를 우리 한국 교회의 수호자로 선물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대답, 우리가 바쳐야할 모든 기도는 오직 하나, 이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므로 특히 오늘 같은 날,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이 믿을 교리의 주인공은 마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셔야 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이야기는 바로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기어이 인간이 되시고자 결단하셨던 하느님 사랑의 깊이가 마리의 무염시태 교리의 바탕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를 위한 무염시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무염시태, 곧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교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1854. 12. 8일에 교황 비오 9세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신앙 교리로 선포하시고, 그 후 4년 뒤인 1858. 3. 25일에 불란서의 루르드에서 벨라뎃다 소녀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이다’라는 답을 주심으로써 교황 비오9세께서 선포한 그 교리를 뒷받침 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염시태나, 성모승천이나, 동정녀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제안에 목숨을 내어놓는 동의를 일평생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원죄 없이 잉태하도록 허락 할 만큼,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욱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오늘 축일을 통해 가르치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의 이 믿음과 봉헌의 삶을 살아내도록 합시다.